1964년은 대중음악사적으로 중요한 년도다. 그해 록그룹 ‘키보이스’와 신중현의 ‘에드훠’에 의해 최초의 한국 록 음반이 등장했고 서수남의 4인조 남성 보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가 최초의 통기타 음반을 발표하며 미8군 출신 가수들과 함께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록, 포크, 팝, 재즈 등 새로운 장르의 바람은 거셌지만 트로트의 철옹성을 깨지는 못했다. 그해는 불멸의 명곡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도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반세기 동안 최다음반(500여장), 최다 취입곡(2300여곡) 가수로 기네스북에 오른 이미자에겐 ‘엘레지의 여왕’, ‘국민가수’등 수많은 찬사가 따라다닌다. 한 가지 기록이 더해져야 한다.
500편에 가까운 영화, TV드라마,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를 취입한 가수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60년대에도 영화나 드라마 주제가 취입은 인기가수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영화 주제가인 ‘동백아가씨’는 국내 최초로 음반판매 100만장 시대를 연 노래이지만 왜색(일본풍)가요로 금지의 낙인이 찍혀 해적판까지 탄생되는 사연 많은 곡이기도 하다.
58년에 데뷔한 유망 신인가수 이미자는 64년 초까지 스카라 극장 건너편 다방들을 드나들며 일거리를 찾았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당대 최고배우인 신성일, 엄앵란 주연, 김기감독의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 취입을 하게 되었던 것. 사실 ‘동백아가씨’는 이미자가 부를 노래가 아니었다.
취입이 내정되었던 가수는 당대 인기가수 최숙자였다. 하지만 미도파 레코드에서 막 독립한 보따리장수 수준의 신생회사 지구가 감당하기엔 개런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신인가수 이미자의 애절한 노래를 귀담아 두었던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으로 개런티가 싼 이미자가 대타로 나선 숨은 사연이 있다.
1964년 여름, 스카라 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 찜통더위를 낡은 선풍기 한 대로 이겨내며 둘째를 임신한 만삭의 현미와 이미자가 함께 녹음작업을 끝냈다.
이때 녹음한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와 이미자의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동백 아가씨’가 두 사람 모두에게 대표곡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먼저 음반을 발표한 현미에 이어 이미자의 노래까지 동반 대박을 터트리자 ‘만삭에 녹음을 하면 대박이 난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동백 아가씨'는 취입 때부터 갖가지 사연이 만발했다. 임정수 사장은 생소한 지구보다는 한 지붕 회사였던 미도파 레이블로 음반을 슬쩍 발매했다. 처음엔 아무 문제없었지만 음반이 날개를 단 듯 팔려나가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미도파 측에서 회사 이름 도용을 문제 삼으며 소송을 걸어왔던 것.
미도파와 지구 두 회사의 같은 '동백아가씨'음반이 존재하는 것은 이런 복잡한 사연 때문이다. 미도파에서 발매된 음반이 초반이고 지구에서 발매된 음반은 재발매 음반임을 기억해두자.
‘동백아가씨’의 첫 녹음버전은 굉장한 고역의 키였다고 전해진다. 재녹음 끝에 그해 7월 이 불후의 명반은 발매되었다.
그런데 타이틀곡은 영화와는 무관한 인기 배우 최무룡의 ‘단둘이 가봤으면’으로 정해졌고 ‘동백아가씨’는 앞면도 아닌 뒷면에 수록되는 푸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음반 발매 후 상황이 급변해 이미자의 노래만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더구나 주제가의 인기가 영화를 능가하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음반을 사려는 대중과 전국의 음반업자들이 아우성을 쳤다. 이에 언론들은 ‘가요계 판도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라고 흥분했다.
이후 ‘동백아가씨’는 35주 동안 인기차트 1위를 점령하는 가요사상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세웠다. 이미자는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극장주들은 그때까지 2,000원이던 극장쇼 출연료의 20배가 넘는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하며 이미자 모시기에 사활을 건 출혈 경쟁을 벌였다. 연주비가 없어 작곡가 박시춘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했던 신생레코드사 지구도 메이저급 회사로 동반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미자는 1년 남짓 사이에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몸값 폭등과 더불어 성남극장, 우미관, 노벨극장, 금호극장 등 하루에 극장 쇼 네 곳을 도는 귀한 몸이 되었다. 작곡가 백영호는 생전에 “그땐 술집에서 술값대신 동백아가씨 음반을 한 장 구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당시의 열풍을 회고했었다.
온 나라가 ‘동백아가씨’ 노래열풍으로 후끈 달아오른 1964년 겨울. 트로트를 천시하고 외국 팝을 선호했던 충무로 음악감상실 세시봉, 서린 동경 음악실의 젊은이들이 ‘동백아가씨’를 합창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미자는 파월장병들이 손꼽는 초청희망 1순위 가수로도 등극했다. 1965년 첫 월남 파병 부대 위문 공연단에 뽑힌 이후 5년 동안 장병들에게 ‘동백아가씨’를 노래했다. 애절한 노래 가락은 장병들의 눈물샘을 자극시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처럼 ‘동백아가씨’는 계층을 초월해 사랑받는 국민가요였다. 이때의 공로로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치하는 물론 1973년 방한한 베트남 티우 대통령으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을 받았다. 최초로 외국의 문화훈장을 수여받은 가수로 기록된 이미자는 이후 국내외에서 3번이나 훈장을 받은 최다 서훈가수로 등극했다.
1965년 말 독주를 계속하던 동백아가씨 열풍이 주춤했다. 라이벌 레코드사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1962년 신설된 한국방송윤리위 ‘가요심의전문위원회’에 의해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던 것. 하지만 1966년 후속곡 ‘흑산도 아가씨’와 1967년 ‘섬마을 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 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며 이미자의 인기 퍼레이드는 고속행진을 계속했다.
이미자 열풍은 현해탄의 높은 파고를 넘었다. 1966년 일본 빅터레코드는 6월과 10월, 11월 3장의 이미자 싱글음반을 제작했던 것. 그 중 2장이 ‘동백아가씨’ 음반이었다.
일본 정서에 맞도록 제목을 ‘사랑의 빨강 등불’로 변경하고 가사도 일부 수정하고 이름도 일본식 발음인 ‘리요시코’로 소개되었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이후 반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시절. ‘이미자가 일본말로 노래를 취입했다’는 소문은 반일 감정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즉시 송환시켜라’는 비난과 노래에 대한 호기심이 뒤섞여 황당한 불법음반이 등장했다. 미모의 외국여성 사진이 담긴 레이블도 없는 소위 ‘빽판’이지만 일본어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왔다.
재킷 뒷면엔 <이미자 히바리고마도리 유행가집>이라고 쓰인 조악한 등사지가 부착되어 있다. 일본에서 밀수입되어 음성적으로 배포된 ‘동백아가씨’의 귀한 해적판이다.
대중음악은 태생적으로 그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격변기에 등장한 ‘동백아가씨’의 여러 음반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대표적인 곡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미자는 대중음악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시대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2006년 KBS 2TV ‘한국 한국인’프로는 박정희대통령과 일본외상이 청와대에서 함께 ‘동백아가씨’를 부르는 이미자의 공연을 구경하는 놀라운 모습을 방송했다.
금지가 되었지만 ‘동백아가씨’가 한일 공식 우호석상에서 버젓이 불리어졌고 박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대중음악에 대한 군사 정권의 이중 잣대를 실감나게 한다. 1987년 8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유달산아 말해다오’ 등 5곡과 함께 22년 만에 금지의 멍에로부터 벗어났다.
2007년, 한형모 감독의 67년작 ‘엘레지의 여왕’이 40년 만에 충무로 국제영화제를 통해 재 상영되어 화제를 뿌렸다. 이미자가 직접 출연한 이 영화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동백 아가씨’의 방송 금지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 최초의 대중가수 일대기 영상자료라는 사실이다. 이미자는 진정 살아있는 대중음악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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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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