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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무렵의 내 서가에는 1천 여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양적으로는 아주 적은 책이 아니었지만, 역사에 관련된 책은 거의 없었고 모두가 현대문학과 관련된 책들이었다.
그런 사정이었는데도 20세기 최고의 역저로 평가되는 아놀드 토인비 교수의 <역사의 한 연구·A STUDY OF HISTORY>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일 때 교수님의 큰 꾸지람을 듣고 마련한 것이었을 뿐, 현대극을 쓰는 나에게는 그렇게 귀중한 존재는 아니었다.
역사에 관한 내 장서가 이토록 빈약한 조건에서 나는 역사 드라마를 쓰게 되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역사드라마를 쓴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로 모른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야사류(野史類)의 잔재미만을 찾아 헤매다가 차츰 역사라는 큰 물결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면 이름 있는 사서(史書)를 가려서 읽어야 한다. 그 변화의 과정을 한마디로 말하면 내 서재의 책이 바뀌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은 3천 여 권에 가까운 장서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국보 151호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이 자리 잡고 있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은 가장 거룩한 스승이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성전(聖典)이다.
그렇다면 500년 치의 일기를 적은 <조선왕조실록>의 분량은 얼마나 될까. 예스러운 기록대로 읽으면 1866권(卷) 887책(冊)이 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조선왕조실록>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하자면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본(國譯本)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가 쉽다.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본은 모두 413권이다. 매권 마다 A4용기 크기의 판형으로 대개 300페이지에서 350페이지 분량이라면 이 국역본을 서가에 꽂으면 50평짜리 아파트의 제일 큰 벽면을 모두 채우게 된다. 또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면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본을 하루에 무조건 100페이지씩 읽어간다면 전부를 읽는데 만 4년 정도가 걸린다.
이 엄청난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하여 보존하고, 그것을 인출(印出)하여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하는 법도와 규범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규범이 왕명이나 권력에 의해 무너졌다면 <조선왕조실록>이 오늘에까지 전해질 까닭이 없다.
내가 장장 8년 동안에 걸쳐 MBC-TV에 실록대하드라마 <조선왕조500년>을 집필할 수가 있었던 것은 이 <조선왕조실록>의 덕분이었고, 그것을 쓰는 동안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사명감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역사가 가르쳐주는 준엄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에 대한, 책으로 인한 에피소드는 참으로 많다.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로 접어들던 격동의 시기인 이른바 구한말의 시대사항과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방송국의 부탁을 받고 손에 넣게 된 것이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그때 나는 사료로서의 <매천야록> 보다 저자 황현 선생의 참 선비된 도리에 머리를 숙이게 되면서 그분의 삶에 매료되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내 삶의 형편없음을 뒤돌아 보는 계기로 삼았다.
1910년 8월에 일본제국은 조선을 강제 합병(경술국치·庚戌國恥)한다. 소식에 접한 매천 황현 선생은 더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남기는 ´유자제서(遺子弟書)´를 쓴다. 그 내용은 오늘을 사는 지식인들에게 너무도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내게는 꼭 죽어야 할 의리(義理)는 없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기른지 500년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목숨을 끊는 이가 없다면 가슴 아픈 일이고도 남는다. 내가 위로는 하늘의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 속의 말씀이 어긋나지 않았다. 이제 깊이 잠들려 하니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 때 매천 황현 선생의 연치 쉰다섯, 더 살아서 그 빛나는 문필로 후학들에게 신천지를 열어 줄 수도 있지를 않았겠는가. 나는 이 글을 자주 읽는다. 읽을 때마다 내가 하는 일들이 한심하고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끓어 오를 뿐이다. 이미 70의 반을 넘긴 처지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도 심히 부끄러운 노릇이 아니랴.
나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역사를 관장하는 신의 품 안에 있으면서 그 신의 감시를 받고자 자청을 하였고, 그 신의 섭리 안에서 살고자 하였다. 그것은 식견을 높이는 일이었고, 정확한 표준을 살펴서 온전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이었다.
옛 지식인들은 자신의 후회 없는 삶을 돌아 볼 때마다 언제나 같은 표현을 빌리면서 자신을 통찰한다. ‘…하늘의 가르침을 거역하지 않았고, 책 속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았다’ 라고. 내 서재에 꽂힌 채 나를 내려다보는 책들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까지 써 온 수십만 장의 원고지에 담긴 내용보다 이제는 내 몸뚱이 하나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역사책을 벗하며 산다.
글/신봉승 극작가
[데일리안 강원]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kind=rank_code&keys=2&id=13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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