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퀴즈로 시작해보자.
조선의 27명 국왕 중에서 문과에 급제한 임금은? 태종 이방원이다. 이방원은 17살 때인 고려 우왕 8년(1383년) 문과에 7등으로 붙었다. 그러면 당시 장원급제는? 훗날 태종과 사돈관계를 맺게 되는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다.
김한로(金漢老 1367년 공민왕16년∼몰년 미상)는 장원급제에도 불구하고 행실면에서 문제가 많아 태종 때에만 두 차례나 독직(瀆職)사건 등으로 파면당했다. 그러나 태종 7년 딸이 양녕대군과 혼인을 하면서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다. 2년 만에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후 대사헌 대제학 등을 거쳐 병조판서에까지 오른다. 김한로는 세자궁에 여자 출입을 도와주는 등 장인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보여 결국 양녕이 폐세자될 때 함께 쫓겨나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김한로의 이 같은 인생역정은 장원이라는 영예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영달(榮達)을 누리지 못했던 조선시대 장원급제자들의 관운(官運)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장원(壯元), 즉 수석합격이야 어느 시대고 자식 키우는 부모라면 그 누가 원하지 않을 수 있는 간절한 소망인가?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의 문집들에서도 '장원급제'는 누구나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정인지(鄭麟趾 1396년 태조 5년∼1478년 성종 9년)는 태종 1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며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그해 3월 11일 하륜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급제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시권(試券-과거 답안지) 3개를 골라 태종에게 올렸다. 장원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셋 중에서 우열(優劣)을 가릴 수 없는가 라고 묻자 하륜 등은 두 개는 비슷하고 나머지는 조금 처진다고 답했다. 이에 태종은 주저 없이 두 개를 내밀라고 한 다음 제비를 뽑듯이 하나를 골랐다. 천도(遷都)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개경복귀설, 경복궁설, 모(무)악산설이 대립하자 동전을 던져(擲錢) 결정을 했던 태종이었다. 그가 뽑은 시권은 정인지의 것이었다. 이렇게 장원급제한 정인지는 세종의 학술정책과 '고려사'서술을 도왔고 세조의 정난에 참여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조선 초 최고의 '과거왕'은 이석형(李石亨 1415년 태종 15년∼1477년 성종 8년)이다. 26살 때인 세종 23년(1441년) 생원과 진사시에 연속 장원한 다음 같은 해 문과에서도 장원급제를 했다. 요즘 식으로 굳이 말하자면 '3시(試) 수석'이었다. 그러나 탁월한 행정처리 능력에도 불구하고 '장원' 특유의 엘리트주의 때문이었는지 정치력은 별로였던 것 같다.
결국 정승에는 오르지 못하고 세조의 집권을 수동적으로 인정하는 범위에서 시와 풍류로 말년을 보냈다. 이후 신숙주의 손자인 신종호(申從濩 1456년 세조 2년∼1497년 연산군 3년)가 진사시와 문과에서 장원을 하고 다시 홍문관 부응교로 있으면서 고위관리를 대상으로 한 과거인 중시(重試)에서도 장원을 했다. 이석형에 버금가는 탁재(卓才)였다. 그러나 벼슬은 참판을 넘지 못하고 연산군 초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오다가 개성에서 객사(客死)했다. 훗날 이이도 시험이란 시험은 모두 장원을 했으나 정승에는 오르지 못했다.
한명회와 함께 수양대군의 책사로 정난을 주도했던 권람(權擥),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愼承善), 선조 때의 가객(歌客) 정철(鄭澈) 등도 문과나 중시의 장원출신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김흔(金言斤) 김전(金銓) 형제가 각각 문과 장원을 했고 김전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장원을 해 '형제' 장원과 '부자' 장원이 겹쳤다. 그 바람에 김안로는 중종 때 한 시대를 풍미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사림들을 핍박해 역사에서는 대표적인 '권간(權奸)'으로 지금까지도 기록돼 사극에서 심심찮게 악역(惡役)의 상징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김안로의 경우 그의 장인 채수(蔡壽)와 아랫동서 이자(李�)도 문과 장원 출신이었다.
김천령(金千齡) 김만균(金萬均) 김경원(金慶元)은 3대가 연이어 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김천령의 경우 연산군 2년 장원을 했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연산군 10년 국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런 시련 속에서 성장한 김만균도 중종 23년 장원으로 관직에 나섰지만 김안로의 견제를 받는 등 순탄치 못한 길을 걸어 벼슬은 참판에 그쳐야 했다.
김경원도 명종 때의 애매모호한 처신으로 사림들의 배척을 받아 선조 때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10대에 문과에 급제하는 소년등과나 장원급제치고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드물다는 말이 쭉 전해져 왔는지 모른다. 인생의 승부는 처음이 아니라 끝에 난다는 교훈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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