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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사 ▣/이런일 저런말

“한국, 친미-반미 효과적 병행으로 발전”

by 세월따라1 2009. 3. 12.

 

 

» 정부 수립 이래 한-미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 협정과 유신 체제, 핵무기 개발 등으로 고비 때마다 미국 정부와 갈등했고, 전두환 정권은 정부 차원에선 밀월을 유지했으나 시민사회의 반미 감정은 극에 달했다. 위쪽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방한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1979),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1985), 멕시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2002). <한겨레> 자료사진

 

냉전체제 아래서 한국이 이룩한 발전은 미국에 대한 전면적 순응이 아닌, 친미와 반미의 효과적 병행 덕분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해방 뒤 미국의 지배질서를 수용한 것은 국가적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 안에서 안보와 경제발전, 민주화를 성취한 것은 한국의 정부나 시민사회가 미국의 완전한 지배와 조종을 거부하고 역동적 긴장 상태를 유지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국제대학원)는 계간 <역사비평> 봄호에 쓴 ‘미국의 범위와 한미관계 총설’이란 논문에서 “외부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은 친미 정책만 편 사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한-미 관계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며 “서독·일본·남베트남 등 미국의 점령을 거쳐 등장한 국가 가운데 한국은 적응과 저항을 결합하며 발전을 이룩한 유일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가 볼 때 ‘보수정부=친미’ ‘진보정부=반미’라는 구분은 한국의 보수세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분법이다. 건국 이래 한국의 보수정부는 국제·남북·국내 문제 등 거의 모든 사안에서 미국과 갈등을 빚어 왔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의 지원으로 탄생한 이승만 정부의 통치기는 양국간 갈등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였다. 미군 철수, 휴전, 전후 복구, 선거, 환율·재정 정책 등 대부분의 핵심 의제에서 두 나라 정부는 첨예하게 부딪쳤다. 미국의 묵인 아래 등장한 박정희 정부도 한-일 협정과 1·21 사태, 유신 체제, 핵무기 개발 등으로 고비 때마다 미국 정부와 갈등했다. 전두환 정권은 정부 차원에선 밀월을 유지했으나 시민사회의 반미 감정은 최악이었다.

 

‘미국의 범위’는 이처럼 순항과 난항을 오간 한-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박 교수가 고안해낸 개념적 도구다. 미국이 한국에서 용인할 수 있는 ‘변화의 상한과 하한’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권위주의 정부의 등장과 붕괴를 설명하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 미국은 4·19 이후 등장한 2공화국 정부가 반공과 질서 유지에 허점을 드러내면서 급진 통일운동 세력에 의해 체제를 위협받자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를 묵인해 군사정권의 등장을 지원했다. 반면 1987년 시민항쟁으로 전두환 체제가 붕괴 위험에 처하자 적극적으로 개입해 반대세력과의 타협을 유도했다.


» 박명림 연세대 교수
박 교수는 “미국에게 한국은 반공의 전진기지이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성공적 진열장이 되어야 했다”며 “이 때문에 미국은 역내 반공기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를 지원했으나, 극단적 독재로 치닫는 것은 견제했다”고 설명했다. 한-미 양국 정부 사이에는 ‘미국의 범위’ 안에서 반공·시장경제의 지속과 정치·경제적 지원을 교환하는 ‘거래관계’가 작동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미국의 범위’는 1980년대 말을 계기로 소멸한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한국의 우위가 확실해지고 내부 민주화가 변곡점을 통과하면서 체제의 상·하한이란 의미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두 나라의 긴장 관계는 한국의 내부 문제가 아닌 안보·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김영삼-클린턴, 김대중-부시, 노무현-부시 조합기에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지만 김대중-클린턴, 노무현-부시 2기 조합기는 어느 때보다 원만하거나 갈등이 없었다는 게 박 교수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심각한 갈등을 반복하면서도 견고한 동맹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박 교수는 흥미롭게도 과거 중국과의 정치·경제적 교환관계를 활용해 상대적 안정과 자율을 누려 온 한국인들의 역사적 경험에 주목한다. 중화 체제 아래서 체득한 생존의 지혜가 현대의 한-미 관계에 생산적 긴장을 불어넣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가 주목하는 것이 한국 내부에서의 반미·친미 간의 전반적 균형이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미국과 갈등하면 시민사회의 반미 정서가 약화되고, 정부가 순응하면 시민사회의 강화된 반미정서가 이를 보완하면서 균형을 이뤄왔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국 정부는 종종 시민사회의 강력한 도전을 활용해 대미 협상에서 중요한 지렛대를 확보해 왔다”며 “이는 결국 한국의 반미가 구조적·이념적 반미라기보다 기능적·생활적 반미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명박-오바마 시대의 한-미 관계에 대해서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지금의 추세로 미뤄 오바마 정부는 북핵은 폐기와 인정의 이중 선택 사이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재협상으로 방향잡을 가능성이 큰데, 이명박 정부가 ‘비핵개방 3000’과 ‘한-미 에프티에이 조기 체결’을 계속 추구할 경우 경제·안보의 최대 현안에서 미국과 정면대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는 미국 정책에 대한 반대 자체를 반미로 간주하고 이를 금기시했다”며 “이 대통령은 ‘이승만의 반미’와 ‘김대중의 친미’를 보면서 한국의 국익 확보가 결코 친미-반미의 이념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교수의 글이 담긴 <역사비평>에는 이승만·박정희·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의 한-미 관계를 다룬 4편의 논문과, ‘한미관계와 북한, 그리고 역사연구’라는 이름으로 박 교수와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나눈 심층대담도 실려 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435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