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1937년5월29일에 태어나 1989년6월24일에 세상을 뜬, 일본인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았던 가수이며 여배우입니다.
한국에도 ‘엔카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는 그녀는 일본의 국민영예상을 최초로 수상한 여성이며, 그녀가 발표한
수많은 히트곡들은 지금까지도 일본국민들의 마음을 적셔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가토우 카즈에(加藤和枝)입니다. 생선가게집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렸을 때무터 노래를 좋아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가요곡을 따라 부르며 일찍부터 노래하는 즐거움을 몸에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소였는데, 1943년6월, 세계대전 중에 아버지가 징병되어 출정하게 된 것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그녀가 아버지를 위해서 부른 노래에 모여든 이들이 모두 눈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녀였던 그녀가 보여준 가창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어머니의 후원으로 그녀는 요코하마 부근을 돌면서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1946년 NHK의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출전했다가 아쉽게도 불합격이 되기도 했었으나, 같은
해 9월에 요코하마에 있는 아테네극장에서 기념비적인 첫 무대를 갖게 됩니다. 이후 여러 극장을 전전하는 생
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유명한 전국구 조직폭력단인 야마구치구미의 3대 조장 다오카 준이치와 알게 되어 귀
여움을 독차지하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후 1948년 5월, 노래만담가였던 가와다를 만나 그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미소라는 유명 가수의 모창을 잘 하는 아이로 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직 어린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귀엽다’라고 말하는 층과 ‘어린애가 어른들의 노래를 저렇게 부르다니…’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일부 평론에서는 ‘어른을 흉내 내는 괴상한 어린이’라는 이미지의 보도를 해서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희극배우를 만나 무대흥행가와 전속계약을 맺게 된 그녀와 어머니는(이때 어머니는 그녀의 매니저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녀에게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을 붙이게 되고, 이때를 기준으로 그녀의 전설이 시작되게 됩니다. 그와 함께 요코하마국제극장의 지배인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정식 매니지먼트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고 그들은 히바리만을 위한 기획을 세워서 성공시키게 됩니다.
1949년1월, 당시의 히트곡인 ‘도쿄부기우기(東京ブギウギ)’를 부르면서 춤추는 소녀의 모습이 알려지면서 영화 <노래자랑광시대(喉自慢狂時代)>에 출연하게 되면서 그 모습을 전국에 알리게 됩니다. 그것에 힘을 입은 미소라는 같은 해 8월에 공개된 <춤추는 용궁성>에 출연, 주제가인 ‘갓파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를 불러 메이저 타이틀사인 컬럼비아와 계약, 정식 가수로서 음반을 출시하게 됩니다. 이어서 내놓은 ‘슬픈 휘파람’이 히트하여 같은 제목의 영화도 제작되었고, 결국 미소라 히바리는 12살이라는 나이에 영화 주연을 맡고 가수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50년에 가와다와 함께 미국에 갔다 온 미소라는 둘이 같이 출연한 ‘도쿄키드’에 출연했고 같은 제목의 노래를 히트시키면서 인기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다양한 영화와 노래를 발표하면서 일본의 아역스타로서 멋진 성공가도를 만들어가는 미소라 히바리는
1953년에 주연한 ‘사장아씨(お孃さん社長)’의 주연을 맡으면서 어머니 키미에가 히바리를 ‘아씨(お孃)’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후 그녀에 대한 호칭이 아씨로 고정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와 함께 공연을 한 신인 남자배우의 경우 스타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성공부적과 같은 존재로 소문이 나서, 그녀와 공연을 원하는 배우들의 러브콜이 끝없이 이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히바리는 1954년에 전통의 NHK홍백가요합전에 처음으로 출전했습니다. 이후 1955년에는 토호영화가 자랑하는 ‘3대 아씨’로서 인기를 얻었고, 이후 그녀는 배우이면서 가수로서 절정의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20살이 되기 전에 그녀는 이미 일본 전국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가 되었고 모든 아이돌스타의 이상형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1956년에 재즈밴드의 리더와 혼약을 했었지만 바로 파혼되었던 일도 화제를 불렀고, 처음으로 가진 오키나와 지역의 라이브에서는 1주일 동안 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그녀가 떠나는 날 공항은 대혼잡을 이루어 이것이 뉴스에서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전후, 어려움이 많았던 시절에 그녀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그것을 이유로 1957년에는 한 소녀팬이 뿌린 염산에 화상을 입어 3주일간 입원을 했던 등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그녀는 일본 최초의 실시간 보도가 이루어진 인기인으로서 그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만 20세를 맞이하여 연예계 최고의 인기스타로서의 자리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8년 4월 1일, 일본 최대의 조직폭력조직인 야마구치의 조장 다오카가 코베예능사를 차리면서 미소라는 이곳 소속이 되는데, 비록 이후에 폭력조직과의 연관성 때문에 많은 스캔들이 있었지만 그녀를 귀여워한 조장의 후원 덕분에 좋은 작품들과 만날 수 있었고 출연한 영화들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1960년대를 대표할 수 있는 가요계의 여왕으로서 군림하게 됩니다.
1962년에는 역시 인기스타였던 배우 고바야시와 결혼해 일을 줄여나가는 모습을 보였지만 어머니이면서 매니저를 하던 키미에를 비롯한 주변 관계자들의 간섭이 끊이지 않았고 그 덕분에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인기스타였고 대중의 열망이 강했던 시기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둘은 곧 별거하게 되고 1964년 이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상 입적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는 법적으로는 일평생 독신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적인 불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 직후에 발표한 앨범은 엄청난 히트를 해서 180만 장 판매라는 기록을 세웁니다. 그것과 함께 꾸준히 발표하는 노래들이 발표되는 족족 히트를 거듭해, 미소라 히바리가 일본가요계에 있어서 ‘여왕’이라는 부동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히바리는 아직 30살도 되기 전에 일본 최고의 배우, 가수, 그리고 재벌의 위치를 가지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1970년에 들어 NHK홍백가합전의 사회를 담당하면서 라스트를 장식하는 가수로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홍백가합전 사상 최초의 일이었고 이러한 인기의 절정기는 한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1973년에 동생이었던 데츠야가 일으킨 불상사로 인해 그녀와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스캔들 의혹이 불거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동생 데츠야는 가수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도박장을 드나들면서 도박장개설, 권총불법소지, 상해, 폭행 권총밀수 등으로 체포되었고 이후 히바리 일가와 폭력단 야마구치구미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각 극장, 공단에서 출연을 거부당하게 됩니다. 덕분에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연속 NHK홍백전의 피날레를 장식한 그녀의 출전도 취소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년간 NHK의 쇼에는 출연하지 않았던 불편한 관계였지만 1977년에 있었던 ‘빅쇼’에 등장하면서 그 관계는 회복되었고 이후 1979년에 있었던 30회 대회에서 역사를 대표하는 가수로서 특별출연을 하게 됩니다.
1970년대의 그녀는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고 하지만 일본의 번영기와 함께 일본 대중이 선호하는 음악 스타일이 바뀌는과도기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 시기에는 그녀의 노래들도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 갔는데, 기존의 엔카나 가요곡이외에도 빠른 리듬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오레파의 아리아까지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녀는 가수로서의 재능을 다시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매니저이면서 친한 업무상의 동료였던 어머니 키미에와 말썽꾼이었지만 역시 친했던 동생 데츠야, 친구 배우들이 잇달아 죽게 되어 그녀는 슬픔에 빠져 술과 담배에 빠지는 생활이 되었고 덕분에 병을 얻게됩니다. 1987년에는 만성간염과 대퇴골 골두괴사라는 병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88년4월11일 도쿄돔에서 벌어진 불사조 콘서트에 고통을 참으려 등장하여 총 39곡을 열창,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런 그녀도 1989년에는 전설적인 명곡 <강물이 흐르듯이(川の流れのように)>를 발표하고는 입원치료와 퇴원을 반복했고 쇼와(昭和)라는 풍운의 시대를 살아온 가요계의 대스타로서 생전에 1500여곡을 녹음하고 오리지널 517곡을 불렀으며, 수많은 영화에 등장해서 그녀의 이름만으로 기억될 수 있는 영화를 남긴 그녀는 아직은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었던 5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동년 7월22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각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2천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떠난 1989년 7월 이후 그녀의 활약을 기념하고자 일본 정부는 그간 여성에게는 수여한 적이 없었던 국민영예상을 그녀에게 헌정하였고, 그녀의 전설은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꾸준히 회자되었습니다.
그녀의 고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후쿠시마현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는데 그녀의 사후에도 그곳을 찾는 이들은 꾸준히 증가했고 결국 1990년에는 새로운 비석이 세워지면서 그녀의 이름을 딴 히바리 거리가 생기고 동상도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팬들과 관광객들에게 친숙한 곳으로 인식되어 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녀는 신격화된 연예인의 존재로서 확립되었고 일본의 수많은 보컬리스트들에게 있어서 그녀의 스타로서의 생활은 모범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녀와 동시기를 산 이들은 물론이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노래하는 공주님’의 인상을 결정지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카즈야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데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유명한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얻었던 비토 다케시나 톤네르즈와 친분을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아들이 그들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바리는 자식이 좋아하는 탤런트나 배우를 집으로 초청해 같이 인사를 시키면서 자식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녀에 대한 일본 대중의 애정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고, 그녀의 인생을 그린 드라마가 새롭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일본의 여성가수로서 영원성을 가진 스타라고 하겠습니다.
[출처] 엔카의여왕 '미소라히바리'|작성자 포항 오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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