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짝을 찾아 흩어지기 직전 찍은 추억사진(1913년경. 재외동포재단)
1903년 1월 초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겔릭(Gaelic)호를 시발로 65척의 선편이 통감부에 의해 이민 길이 막히는 1905년까지 7226명을 실어 날랐다. 1904년 6월 17일에도 하와이행 이민선은 기적을 울리며 인천항을 뒤로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1850년대와 1880년대부터 이민사회를 이뤄 호락호락하지 않은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을 대체할 인력을 조선에서 구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국제적 경험이 없는 순진한 어린이 같은 사람들’이자 ‘가난한 나라에서 너무 힘들게 살다 보니 값싼 임금에도 만족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라 없는 그들은 소나 말처럼 채찍질을 당하며 ‘죽지 못해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 모든 차별과 착취를 이겨내고 새 터에 뿌리를 내려갔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 여성은 637명밖에 없었기에 수많은 노총각들이 먼 고국으로부터 신붓감을 구했다. 1000여 명의 ‘사진신부(Picture Bride)’가 1910년부터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되는 1924년 5월 15일까지 고국을 등질 때 찍은 젊디젊은 남편감 사진을 들고 하와이로 건너왔다. 그녀들은 배우자가 실제로는 십수 년 이상 연상임을 모르고 태평양을 건넜다.
자기 짝을 찾아 흩어지기 직전 찍은 추억사진(1913년경. 재외동포재단,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현실문화연구, 2007년) 속 그녀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왜 그녀들은 사진신부 되길 주저하지 않았을까? 하와이 한인사회의 목탁 ‘국민보’는 전한다. “다 학교 바람을 쏘이지 않았으면 태반이 예수교회 공기를 먹은 사람이라 당초에 만 리 밖의 신랑을 구할 때에는 그 희망이 한이 없어 우선 본국을 떠나면 일인의 압제도 면하고 외국에 나가면 본국의 내정도 말하며, 또는 공부도 더 할 수가 있고 혁명운동도 할 수가 있고 필경에는 십 년 동안 서양 공기를 먹은 사나이나 십 년 동안 바다 밖에 두류하는 애국지사를 위로하여 평생을 함께하고 백년을 해로하자는 욕심이라.”
그러나 ‘국민보’는 그녀들 앞에 놓인 현실이 “낙원이 아니라 곧 지옥”인 경우가 많았음을 고발한다. “독약을 먹어 죽기를 시험하고 피를 토하여 원통함을 뿜으며, 남정에게 매를 맞고 방 안에 갇혀 앉아 일월을 구경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농어촌 지역 신혼부부 열 쌍 중 두 쌍 이상이 국제결혼으로 맺어지는 오늘. 한 세기 전 사진신부들의 슬픈 삶은 우리 시민사회를 소스라쳐 깨어있게 하는 거울로 다가선다.
[중앙일보]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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