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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사 ▣/주마등

20세기 최초 한류스타 최승희의 '월드투어'

by 세월따라1 2011. 9. 7.

 ‘조선이 나흔 무용 천재’ 최승희, 3년간 월드투어 나서다

 

 

1937년 2월 20일 종로 부민관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인기절정의 최승희 무용공연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튿날자(2월21일자) 조선일보는 ‘입신의 율동미! 만목 도취ㆍ열광’ ‘정각 한시간전에 만원으로 입장거절’ ‘부민관 개관이래 초유의 성황’ 등의 제목 아래, “최승희 무용의 첫날 이십일의 개막은 밤 칠시라는데 네시경부터 몰리는 군중은, 다섯시 반경 벌써 부민관이 터질듯이 차고 넘어, 만원패를 걸고 입장을 거절하지 안흘수 업시되었다”고 전했다.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현대무용의 개척자 이시이 바쿠(石井漠)문하에 들어가 현대무용을 익힌 최승희는, 10여년전인 1927년 10월 26~27일, 이시이 무용단과 함께 귀국해 이틀동안 경성 시내 공회당에서 첫 공연을 펼쳐었다. 당시 공연은 대만원을 이뤘고, 28일 우미관에서 주야 2회의 연장공연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용단원 가운데 최승희의 무용은 “조선인의 피를 통하야 나오는 그 엇더한 멜로듸를 듯는듯할뿐 아니라 그의 고흔 맵시는 모래사장의 한송이 해당화나 울미테 핀 무궁화 가타서 이채를 들어내”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1927년 10월 28일자)

 

늘씬한 키(167cm)에 아름다운 얼굴, 파워넘치는 율동은 관객을 압도했고,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그녀는 모든 남성의 우상이었다. 부민관 공연에 앞서 일본 교토 보총극장에서 열린 공연에선, 최승희를 짝사랑 하던 청년이 단도를 들고 무대로 뛰어올라 정사(情死)를 요구하는 대 소동이 벌어졌다. 난동을 부린 청년은 교토제대를 졸업한 인텔리로, 삼정생명 보험회사에 근무중이던 멀쩡한 인물이었다.(1937년 2월 5일자)

 

국내 첫 공연후 10년만인 1937년, 그녀는 세계 무대로 진출했다. 조선일보 1937년 10월 26일자는 ‘조선이 나흔 무용천재’ 최승희(崔承喜)의 ‘세계일주 무용 행각(行脚)’ 소식을 ‘조선 의복으로 세계를 일주’란 제목아래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오는 12월 19일에 횡빈을 출발, 론돈에서 처음 모대를 밟기 시작하야 파리, 백림, 부랏셀, 부다페스트, 로-마, 우인(비엔나), 기타 구주에서만 일년간을 지나고 그 다음해는 카나다 아메리카를 돌 것이라는 데, 계약자는 중국의 매란방(梅蘭芳)을 초빙공연한 미국인 ‘비킨스’가 이번 최승희 여사와 계약을 하게 되였다”고 밝혔다. 아울러 “최승희가 내세운 계약 조건의 첫번째는 조선의복으로 세계일주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만인의 연인' 최승희가 한복을 입고‘월드 투어’에 나선다는 소식이다. 매란방은 중국 경극의 대가다.

 

실제로 최승희는 남편 안막(安漠)과 문하생 김민자(金敏子) 등과 함께 그해 12월29일 횡빈(橫濱)을 출발, 샌프란시스코(桑港)로 향했다.(1937년 12월 28일자)

 

그녀의 공연은 구주(歐洲)가 아니라 미주(美洲)에서 먼저 막이 올랐다.조선일보 1938년 2월 7일자 사회면에, ‘최승희 여사 첫 공연, 상항서 폭발적 대환영,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페니와 계약, 동양인 최초 6개월간 전미 행각(行脚)’이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조선이 나흔 무용계의 여왕 최승희’는 1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을 열었고, “역시 예상과 억임업시 폭발적 인끼 속에 대갈채를 바더 조선 정취를 석근 꼿다운 예술로, 저네들을 완전히 도취시키고 마럿다”고 했다.

 

아울러 “공연을 지켜본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페니에서는 즉시로 전 미국을 통하야 6개월동안 공연을 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고 전했다. 아울러 “공연을 지켜본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페니에서는 즉시로 전 미국을 통하야 6개월동안 공연을 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며, 이는 “동양인으로서 이 단체와 계약하기는 금번 최녀사가 처음”이라고 해설했다.

 

상황에 이은 2월 20일 뉴욕공연 후,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는 “무용중 ‘반도의 방랑자’는 경쾌한 유-모어를 가젓고 뗄리케-트한 표현과 어울리는 옷매무새는 관객을 힘껏 이끄는 힘을 자기고 잇다”고 평했고, 뉴욕 타임스는 “최승희 여사의 옷매무새는 관객을 이끄는 매력이 잇고, 표현기술에 잇서서는 엉성한 데가 업시 훌륭한 무용을 보여주엇다”고 논평했다고 당시 조선일보는 전했다.(38년 2월 23일)

 

그 사흘 뒤(2월 26일자)엔 최승희의 ‘메트로폴리탄 입성’을 알리는 소식이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21일부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한달동안 절찬 공연을 하기로 되엿는데, 동양인으로 이만한 절찬과 또한 이만한 장기공연의 특별흥행을 하게 된 것은 최양으로서 효시”라고 강조했다.

 

동양인 최초 6개월간 전미 행각(行脚)’은 잇달아 조선의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태평양 건너서의 미스 최승희, 전미를 석권하는 그 인기’란 제목아래 샌프란시스코, 헐리웃, 뉴욕 공연등의 성과를 전하고(1938년 2월 26일자), ‘동경(憧景)의 스타-를 좌우에, 최승희 청소(淸笑)’란 제목아래 헐리웃 대스타 남우(男優)를 좌우에 거느리고 맑게 웃고 있는 사진(1938년 7월30일자), ‘절찬받은 최승희’란 제목 의 기사는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최승희의 승무사진을 전재하기도 했다.(1938년 12월 1일)

 

 

최승희는 뉴욕 장기 공연을 마치고, 이어 필라델피아, 보스톤, 시카고 등을 순연(巡演)한 뒤 유럽으로 향했다.(1938년 12월 15일자) 1월 30일 파리 초연(初演)은 물론 2월중순부터 펼쳐진 부륏셀과 남불(南佛) 지방 수개소에서 공연, 파리의 2차공연 준비 소식등이 잇달았다. (1939년 4월 28일자) 4월 15일부터는 화란 5 곳, 백이의(白耳義/벨기에) 3곳으로 공연여행을 떠날터이며,인기가 높아 가을철도 구라파에 머물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4월 15일부터는 화란 5 곳, 백이의(白耳義/벨기에) 3곳으로 공연여행을 떠날 터이며, 인기가 높아 가을철도 구라파에 머물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1939년 4월 28일자) 같은 지면에는 구미에서 인기 절정의 최승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세계진출을 목표로 한 영화를, ‘만영(滿映)’ 영화사가 준비 중이며, 스토리는 당대 최고 소설가 최남선(崔南善)이 쓸 것이라는 기사도 등장했다.

 

또 파리 ‘샤이요(Chaillot)’ 국립 극장에서 열린 무용발표회에는 3000석이 전부 만원이었고, 피카소와 마티쓰도 관람하며 대화제를 뿌렸다고 알렸다.(1939년 7월28일자)

 

최승희의 유럽투어는 2차세계 대전의 발발로 중단됐다. 1939년 9월 전쟁이 나자 최승희는 유럽 순회공연을 중단하고 귀국계획을 세웠다. 피난선을 타고 미국 뉴욕으로 간 그녀에게 다시 6개월 미주 순회공연(巡演)계약이 들어오면서 귀국은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1939년 11월 9일자)

 

 

미국 공연이 끝나자 이번에 남미 투어 제의가 들어왔다. 조선일보 1940년 5월30일자에는 ‘무희 최승희 여사 남미서 대호평, ‘리’시의 초(初) 공연성황’이란 제목아래, “무도 행각을 하기 위하여 남아메리가에 건너간 최승희 여사는 지난 27일에 예술협회 주최로 리오데쟈네로 시립극장에서 남아메리가에 잇서서의 최초의 공연을 개최하엿다.매일 입장자 2200여명에 달하는 성황을 이룬다.

 

구주전쟁의 무서운 뉴스에 매일가치 신경을 괴롭피고 잇는 리오데쟈느로 시민들은 하로밤을 동양모도의 신비에 도취되어 신경을 위안하고 잇다. 최승희 여사는 남아레리가에서 약 40회가량의 공연을 맛치고 오는 11월경에 귀국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의 그 뒤 행적은 조선동아가 1940년 8월 폐간되면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최승희는 그해말 일본으로 돌아왔다. 투어에 나선지 3년만이었다. 그녀는 ‘프로 예술가’ 남편을 따라 1946년 월북, 북한에서 무용연구소를 열고 북경에서도 무용을 가르쳤다. 2003년 11월 북한 조선중앙TV는 그녀가 1969년 8월8일 사망했다고 전했다.

 

그녀는 20세기 최초의 한류스타였다. 한국예술평론가협회는 1999년 그녀를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에 선정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손기정과 함께한 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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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chosun.com/article.log.view.screen?blogId=2682&logId=582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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