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앙 CCTV가 지난해말 발해(渤海, 698~926년)를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은 말갈족(靺鞨族) 정권이며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이 당나라 현종이 보낸 사신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 책봉받는 장면이방송돼 국내에서 논란이 인 적이 있다.
발해가 우리 민족의 역사임에도 중국이 틈만나면 중국의 지방민족 정권이라고 강조하고 나서는 것은 발해 영토와 유적지의 대부분이 중국의 동북지역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일방적으로 없던 사실을 주장하거나 사실을 왜곡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영토는 변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국제화로 인해 국가간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영토의 개념도 경제적, 문화적 개념까지 확장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출신이며 발해가 고구려의 대를 이은 우리나라의 역사임을 잊지 않고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일이다.
발해 건국사는 최수종 주연의 TV드라마 134부작 ‘大祚榮‘(대조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친숙해 진 바 있다. 또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발해를 꿈꾸며’란 노래도 음미해볼 만하다.
언젠가 작은 나의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에서
KBS 드라마 '대조영' 포스터. 출처=KBS 방송
오랫동안 분단국가에서 살다보니 북한 저 너머 우리조상들이 말달리던 광활한 대지를 우리는 잊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2010년 9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牧丹江) 닝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에 있는 발해국상경용천부유적지(渤海國上京龍泉府遺址)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하얼빈(哈爾賓)에서 차를 출발해 무단장에 가까워 질수록 산세(山勢)가 한국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자연스레 든다.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1,300여년전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거침없이 질주했을 발해인들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상경용천부 발해 유적지 대대적 복원…박물관 “발해사는 중국의 역사”로 소개
상경용천부는 현존하는 발해 유적지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은 756년 초 문왕(文王)이 도읍을 정한뒤 멸망할 때까지 162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만큼 유적이 많고 유물이 많이 발굴된 곳이다.
발해 삼채(三彩)도자기. 출처=포털사이트 바이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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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삼채향로(三彩香爐).출처=포털사이트 바이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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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발해 유적지를 복원하는 목적은 국내외 관광 수입과 발해사의 중국사 편입의 과정으로 압축된다. 중국은 머지않아 상경용천부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발해유적지 복원을 위한 발걸음은 빨라질 수 밖에 없다.
상경용천부 유적지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渤海’(발해)라고 적힌 대문을 새로 세워놓았다. 이 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발해국상경용천부궁성유지’(渤海國上京龍泉府宮城遺址)라는 입표지판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박물관, 왼쪽은 궁성유적지로 연결된다.
상경용천부 발해박물관에 걸린 대조영(大祚榮)초상으로 고구려를 잇는다는 의미로 고왕(高王)이라고 불렀다. ⓒ하성봉
박물관에는 고왕(高王) 대조영을 비롯해 역대왕 15명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고 석재 용머리, 기와, 기와 막새, 무덤비석, 세발 철제 솥, 동(銅)으로 만든 인형, 도자기와 철제 화살촉과 투구 등 각종 유물들이 유리상자안에 전시돼 있다. 또 당시의 화려했던 궁정생활 모습 등을 벽화로 그려 놓고 궁성복원 모형도 만들어 놓았다. 전시된 유물들은 극히 일부분이지만 과거 발해의 찬란했던 문화를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해 볼 수 있다. 발해 유물은 하얼빈(哈爾賓) 시내에 있는 헤이룽장성 박물관(黑龍江省 博物館)에 더 많은 자료가 전시돼 있다.
상해용천부 박물관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발해를 설명한 역사다. 박물관 전시실 가운데에 세워둔 ‘서언’(前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발해국은 당나라시대 우리나라의 말갈족(지금의 만주족 선조)이 서기 698년에 건립한 지방민족정권이었으며, 당왕조 관할하의 한 개 변방의 주(州)였다…출토된 대량의 진귀한 문물이 전해져 오는데 이는 중원문화가 발해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 북방인민의 총명한 재주를 반영한다…발해국의 역사는 중화민족발전사상의 중요한 한 페이지이다.”
발해(渤海)는 '해동성국'(東盛國)으로 불릴 만큼 중국 만주지역, 북한 일부와 연해주까지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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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을 뜯어보면 발해는 말갈족이 세운 지방민족 정권으로 당나라가 관할했던 변방의 일개 주(州)에 불과하며 당나라의 문화권에 속할 뿐 아니라 궁극으로 중화민족발전사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중국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상경용천부 궁터에 현무암 주춧돌 원형 그대로…8각 우물속 샘물은 아직 단맛
상경용천부는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나눠지는데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외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궁성으로 통하는 도로가 외성을 가로질러 통과하는데 이 지점에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정부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点文物保護單位)라고 표시한 비석이 두개 서 있다.
상경궁성 2호전에서 출토된 용무늬가 새겨진 옥조각. 출처=포털사이트 바이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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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는데 외성의 둘레는 16㎞ 정도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내성안에 궁터가 나타난다. 당시 상경용천부의 규모는 서울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4대문안 규모와 비슷했다고 한다. 중심도로폭은 서울의 광화문 도로에 해당하는 110m나 되었다. 특히 상경성은 평야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서울보다 더 웅대해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터를 둘러 보면서 놀라운 사실은 당시에 사용한 석재가 모두 표면에 작은 구멍이 나있는 검은색 현무암이라는 것과 당시 궁성과 회랑을 떠받들고 있던 주춧돌이 풀밭속에 박힌 채 1200여년동안 원래의 위치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수풀속에 버린듯이 굴러다니는 큰 돌덩이와 나무아래에 수북히 쌓인 깨진 기왓장을 바라보면서 ‘잃어버린 발해의 슬픈 역사’가 떠올랐다. 한반도의 북부지역을 포함해 끝없는 만주 벌판에서 연해주까지 한반도의 3배 가량 되는 우리 역사에서 220여년동안 가장 큰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이름을 떨친 발해의 역사가 국적도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왔던 것이다.
상경용천부 궁성내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은 당시 궁정에서 음수용으로 사용하던 우물로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있다. ⓒ하성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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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방문했을 당시 궁터에서는 유물 발굴과 함께 터고르기와 날라온 건축 자재가 쌓여 있는 등 궁성복원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궁터에서 눈여겨 볼 유적지는 궁터 옆쪽에 비켜 있는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이다. 이는 궁정에서 음수용으로 사용하던 우물로 백석(白石)을 8각형이 되게 쌓았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 우물의 입구는 1963년에 보수한 것이지만 우물을 덮은 정자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거란족은 상경궁을 침입했을 때 궁터를 모두 불태웠는데 우물의 정자만은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우물의 직경은 약 1m, 깊이는 5.6m로 우물안에 지금도 샘물이 고여 마실 수 있으며 오염이 되지 않은 맑은물에 단맛이 난다고 한다. 이 우물의 물은 왕도 마셨는데 정자옆에 서면 발해의 궁녀가 물을 깃기 위해 우물가에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현무호는 ‘현무암’석재 채석장…발해진 ‘샹수이춘’(响水村)은 최고품질의 쌀생산
상경용천부 궁성 북문에서 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현무호’(玄武湖)라는 호수가 나타난다. 현무호는 발해 3대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가 이곳을 서울로 정하면서 외성, 내성, 궁성 등을 쌓기 위한 대량의 돌을 캐낸 채석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채석장이었으나 이후 물을 대 지금은 거대한 호수로 되었다. 1990대 초 현무암을 캐낸 곳이라는 뜻으로 이 호수의 이름을 ‘현무호’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얼빈의 흑룡강성박물관(黑龍江省博物館)에 비치된 발해맷돌로 상경용천부에서 출토됐다.ⓒ하성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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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용천부가 있는 발해진(渤海鎭)에는 만주족(滿洲族)이 70%가 거주하며 조선족(朝鮮族)촌이 들어서면서 쌀농사를 짖고 있다. 이 곳의 샹수이춘(响水村)은 화산 용암대 위의 현무암 부식토 지대로 용암대의 지열로 수온이 다른 곳보다 높은데다 수질이 좋아 우창(五常)쌀과 함께 중국내에서 최고 품질의 쌀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발해진에 있는 전통 가옥은 제주도처럼 현무암으로 담장을 쌓인 곳이 많은데 이 일대는 이전 화산의 용암이 흘려내려 형성된 평지였다.
흥륭사(興隆寺)에는 국보급 유물이 가득…발해 석등탑 1200여년동안 그자리에
외성내에 있으며 궁성에서 1㎞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흥륭사(興隆寺)라는 사찰안에는 흥미진진한 국보급 보물로 가득 차 있다. 지역 사람들은 ‘흥륭사’라는 이름보다 남쪽에 있는 사당이란 뜻으로 ‘난다먀오’(南大廟)라고 주로 부른다. 발해는 유교로 통치이념을 삼으면서도 지배계층들은 불교를 신봉했다. 이 사찰의 터는 발해 당시 그대로 이지만 멸망할 때 불탔으며 현재의 사찰은 청나라 강희(康熙)때인 1722년 새로 지으면서 ‘흥륭사’로 이름을 붙였으며 이후 개증축했다.
흥륭사내 발해의 유물중 대표적인 석등탑은 현무암으로 만든 뛰어난 불교조각품으로 1200여년동안 한번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성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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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귀한 보물은 국사책에서 익히 보던 발해 석등탑(石燈塔)이다. 이 석등탑은 발해 시기의 유물중 가장 뛰어난 불교조각품이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졌으며 1200여년동안 한번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석등은 찬란했으며 굴곡진 발해의 역사를 온 몸에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높이는 6.3m로 옥개석(屋蓋石,지붕처럼 덮는 돌)과 화사석(火舍石,등불을 밝히는 부분)에는 정교한 목조 건축양식이 잘 표현돼 있다.
흥륭사(興隆寺)내에 있는 대석불은 경주 석굴암과 달리 현지에 나는 검은색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하성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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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대석(上下臺石)에 새겨진 연꽃은 부조가 강하여 발해인의 힘찬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중대석(中臺石,화사대를 받치는 기둥)은 가운데를 살짝 불룩하게 만들어 안정감과 균형미를 더했다. 이 석등은 12개의 현무암 조각을 짜맞춰 포개놓았으며 한쪽으로 기운 것을 1966년 10월에 바로 세워두었다고 한다.
석등 바로 앞에는 삼성전(三聖殿)이 있는데 이 안에도 역시 1200여년된 대석불(大石佛)이 모셔져 있다. 연화대좌(蓮花臺座)위에 불상을 앉힌 모습으로 석불의 높이는 2.35m인데 전체 높이는 3.3m정도로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최대규모다.
흥륭사(興隆寺) 경내의 사리탑. 출처=포털사이트 바이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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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에 절이 불에 타 중건했으며 한때 석불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파손된 것을 수리해 제자리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석가모니가 설법을 하는 모습으로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땅을, 왼손은 무릎위에 가볍게 놓은 채로 하늘을 가르키면서 천지간의 만물을 망라해 지칭하고 있는데 발해 불교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대석불이 있는 삼성전앞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암수사자 두 마리가 있다. 키 1.53m 높이의 이 사자석상은 초석위에 앉아 머리와 가슴을 치켜들면서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주시하면서 포효하는 모습이 발해의 위엄과 기상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사자석상은 중국내의 일반적인 사자상과 차이가 난다.
흥륭사내 발해의 숫사자 석상은 위풍당당하게 생식기를 드러내고 포효하고 있다.ⓒ하성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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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륭사내 암사자 석상은 새끼 사자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하성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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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숫사자가 앞발로 구슬을 밟고 있고 암사자는 새끼 사자를 앞발로 굴리며 노는 모습이다. 그러나 발해의 숫사자는 위풍당당하게 남성의 생식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암사자는 새끼 사자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 조각돼 있다. 이는 중국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발해만의 모습이다.
<발해 세력권 러시아 아무르강까지 미쳤나>
한러 고고학 탐사를 통해 확인된
기존보다 더욱 올라간 시베리아 아무르 일대의 <트로이츠코예 발해 유적> 위치.
참조 http://blog.daum.net/yangsooan/848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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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서 발해유적 발굴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에서 발해 시대(8∼10세기) 고분군이 확인됐다. 그간 러시아 트로이츠코예 지역을 발해의 최북단 영역으로 추정하는 학설은 꾸준히 제기됐으나 이를 입증하는 유물이 대거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8일 러시아과학원 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함께 7∼8월 아무르강 유역 트로이츠코예 유적을 조사한 결과 발해 세력이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트로이츠코예 고분 조사에서 목곽 또는 목관을 불태우는 장법, 다인(多人) 2차 세골장법(洗骨葬法), 말뼈 부장 등의 매장풍습이 확인됐는데, 이는 중국과 연해주 지역의 발해 고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매장풍습이다.
또 주변지역 지표조사 결과 고구려의 전통을 잇는 발해 석실분이 발견됐으며, 행정치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성이 여럿 분포하고 있음도 확인했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문화재연구소 홍형우 학예사는 “이번 발굴 결과를 통해 아무르 지역과 발해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며 “발해 무왕과 선왕대에 흑수말갈의 영역을 포함해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했다는 문헌 기록과 아무르주의 제야강 유역까지 발해 영역으로 보는 북한과 러시아 학계의 견해와 부합된다”고 설명했다.
송민섭 기자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발해의 세력이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7-8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지부 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함께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의 트로이츠코예 유적과 연해주 동해안의 소콜로프카 유적을 조사한 결과를 18일 발표했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은 1천여 기의 고분이 밀집된 러시아 극동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무덤의 조성시기가 발해의 존속연대(698-926년)인 8-10세기로 추정돼 러시아 학계에서 발해와의 관련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문헌자료 등 2차 자료를 통해 발해의 최북단 영역을 추정하는 학설은 제기됐으나 고고학적으로 이를 입증할만한 유물은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문화재연구소가 트로이츠코예 유적을 조사한 결과 목곽 또는 목관을 불태우는 장법, 다인(多人) 2차세골장법(洗骨葬法), 말뼈 부장 등의 매장풍습이 확인됐다. 이런 매장풍습은 중국 및 연해주 지역의 발해고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또 주변지역 지표조사 결과 고구려의 전통을 잇는 발해 석실분이 발견됐으며 행정치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의 성이 여럿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트라이츠코예 고분군 |
문화재연구소 홍형우 학예사는 "이번 발굴결과를 통해 아무르 지역과 발해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며 "발해 무왕과 선왕대에 흑수말갈의 영역을 포함해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했다는 문헌기록과 아무르주의 제야강 유역까지 발해의 영역으로 보는 북한 및 러시아 학계의 견해와 부합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연해주 동해안에서 5㎞ 가량 떨어진 낮은 언덕지대에 형성된 소콜로프카 유적에서는 평면형태가 원형이며 지름이 11-12m에 이르는 연해주 최대 규모의 '얀콥스키문화' 적석유구(積石遺構)가 발견됐다.
문화재연구소는 '얀콥스키문화' 유적은 두만강 유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며 "연해주와 두만강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동해안 일대의 상호관련 연구에 기초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759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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