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발효주인 맥주는 이제 사실 그 종주국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명실상부한 '세계인의 술'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종류와 즐기는 방법도 다양해져 취향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는 폭도 넓어졌다.
오랫동안 사랑받으면서 가장 대중적인 술로 성장한 맥주는 2016년 현재 어떻게 읽히고 있을까.
'맥주 후진국' 대한민국
맥주가 처음 국내에 들어온 것은 구한말이다. 1933년 일제는 일본에서 가져온 원료로 한국에서 맥주 생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기사 더보기
맥주는 2016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술이다. 지난해 한국에서는 맥주 소비량이 소주보다 높았고, 맥주 시장은 점점 발전하면서 커지고 있는 추세다. 그간 '라거 맥주'로 대표되던 한국 맥주는 맛이 '싱겁다'라는 평을 받았다. 모든 맥주 회사들이 특색없이 밍밍한 맛을 유지해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맥주 후진국'이었다. ▶기사 더보기
이런 불평과 불명예를 벗어나기 위해 최근 한국의 맥주 시장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마시던 맥주에서 작은 규모로 마시는 것을 선호하고, 취향과 맛도 이에 발맞춰 세분화하고 있다. 맥주 자체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맥주와 함께 즐기던 음식, 장소도 이전보다 다양해졌다. 대한민국 맥주 문화는 현재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봤다.
현재, 대한민국이 마시는 맥주
소규모로 만든 맥주가 더 맛있다.
'라거 맥주'로 천편일률적이었던 맥주시장이 지금처럼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수제 맥주의 힘이 크다. 수제 맥주의 등장은 맥주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2014년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서울에 있는 수제 맥주 전문점에서도 각 지역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다양한 맛과 향의 맥주를 맛볼 수 있게 됐다. 개성 있는 맛을 뽐내는 수제 맥주들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수제 맥주 열풍’이 불고 있다. 사진은 서울 상수동의 수제 맥주 전문점 케그비에서 파는 필스너, 페일에일, IPA, 바이젠, 쾰시, 포터 맥주(왼쪽부터). /김지호 기자
크래프트 비어, 하우스 맥주 등으로 불리는 수제 맥주는 대기업이 아닌 '마이크로브루어리'(microbrewery·5kL 이상 75kL 이하 규모의 소규모 맥주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뜻한다. 양조장마다 서로 다른 제조법을 사용해 각기 다른 맛과 개성을 지니는 게 특징이다.
수제 맥주가 집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게 된 건 2014년 4월 주세법 시행령이 일부 개정되면서부터다. 소규모 맥주 양조장에서 만든 수제 맥주의 외부 유통이 가능해지자 특색있는 수제 맥주를 받아 판매하는 전문점이 잇따라 생겨났다.
크래프트 비어 (Craft beer) : 소규모 양조업체가 대(大)자본의 개입 없이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만드는 맥주. 저마다의 방법으로 만들기 때문에 맛과 개성이 강하다. 대형 맥주업체가 대량 생산하는 똑같은 맛에 질린 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생산하는 특색있는 맥주를 선호한다.
직접 만들어 먹는 맥주가 맛있다.
맥주를 사먹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먹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재료와 공간을 제공해주는 서울 성동구 옥수동 '소마공방'에는 지난해부터 맥주 만들기 과정을 문의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여기서 맥주를 제조하는 데는 10만~20만 원 정도가 든다. 잘 익은 보리를 갈아 약한 불에 우려 몰트를 만들고 여기에 물과 맥아즙을 넣고 끓인다. 여기에 홉(Hop)을 넣고 냉각한 뒤 효모를 넣어 발효시키면 맥주가 된다. 발효, 숙성까지 40일이 걸린다. ▶기사 더보기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굿비어' 공방(工房) 역시 맥주를 만드는 곳이다. 이들은 다음카페 '맥주 만들기 동호회(맥만동)' 회원들, 한 달 뒤 있을 모임에 들고 갈 맥주를 손수 만들려고 이곳에 모였다. 이들이 이날 만든 맥주는 모두 18L나 됐다. ▶기사 더보기
소소하게 마시는 맥주가 더 맛있다.
가정용 맥주 소비가 유흥용을 앞지른 것은 2013년부터다. 여러 차수를 돌며 폭탄주를 즐겨 마시던 기존의 회식 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캠핑과 파티 등 가족 레저 시장이 커지면서 가정용 맥주 판매가 크게 늘었다. 또 경기 불황도 가정용 맥주 소비를 늘리는데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 ▶기사 더보기
대학가의 오랜 술자리 문화도 변하고 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새벽까지 이어졌던 술자리가 사라지고, 가까운 지인들과 가볍게 마시는 '작은 술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취업난이 심화되고 파편화·개인화된 대학가에서 학생들을 위로하는 건 '작은 맥줏집'이다. 한 대학생은 "친구 몇 명과 부담 없이 술을 마실 수 있어서 스몰 비어집을 자주 찾는 편"이라고 말했다. ▶기사 더보기
이제 '맥주'라는 말은 더 이상 한가지 종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맛과 향에 따라, 또는 맥주에 얽힌 이야기에 따라 자신만의 맥주를 즐기는 이들이 늘어났다. 맥주와 관련된 문화와 취향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중이다.
발효공법에 따라
맥주의 맛을 크게 결정짓는 것은 '발효공법'이다. 맥주 제조는 가장 먼저 보리의 싹을 말린 맥아에 물을 붓는 것부터 시작한다. 물에 재워둔 맥아 속 전분이 당으로 바뀔 때, 홉(hop)을 넣고 끓인다. 효모를 넣고 발효를 시키면 알코올과 탄산가스가 생성된다.
이 발효 시기에 어떤 효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맥주 맛이 결정된다. 상온에 가까운 고온에서 발효시킬 때 위로 떠오르는 성질을 가진 효모를 사용하는 상면(上面)발효 맥주의 맛은 쓰고 진한 향이 난다. 발효가 끝나갈 때, 10도 정도의 저온에서 아래에 가라앉는 효모를 쓰는 하면(下面)발효 공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청량감을 주는 라거 맥주를 만들 때 쓰인다.
라거 맥주와 에일 맥주 안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라거 맥주라 하면 페일 라거(Pale lager)를 가리킨다. 적당한 청량감과 쌉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보다 홉의 느낌이 더 강한 라거를 필스너 또는 필스(Pilsner, Pils, Pilzen)라고 한다. 필스너라는 이름은 이 맥주가 개발된 체코 플젠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황금빛 맑은 맥주의 시대를 열어준 맥주이므로 라거를 얘기할 때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엠버 라거(Amber lager)는 목넘김이 부드러운 라거 맥주로 사무엘 아담스가 가장 대표적이다. 다크 라거(Dark lager)는 라거 맥주에서 유래한 흑맥주이며, 보크(Bock)는 독일에서 강한 도수를 가리키는 맥주다. 라거 맥주 중에서 가장 맥아 향이 풍부하고 묵직한 느낌을 준다.
시장점유율로 따지면 라거 맥주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에일 맥주는 특유의 맛과 향으로 사랑받아왔다. 가장 기본적인 에일 맥주는 페일 에일(Pale ale)이다. 라거보다는 묵직한 느낌이지만 그렇게 풍미가 강하지는 않다. 다크 에일(Dark ale)은 원료가 되는 보리를 탈 정도로 까맣게 볶아 발효시켰기 때문에 어두운 빛깔을 띤다. 스타우트(stouts)와 포터(porter)가 모두 다크에일 맥주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도수를 높인 스트롱 에일(Strong ale)과 연하고 살짝 신 맛이 도는 라거와 같은 향이 나는 훼이트 비어(wheat beer) 등이 있다.
만든 나라에 따라
"파울라너 없어요? 벌써 동났나요?"
요즘 일부 대형마트 수입 맥주 코너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파울라너'는 독일 뮌헨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비어(밀맥주) 브랜드. 최근 수입 맥주 붐과 함께 라거 일색이던 한국인들의 맥주 입맛이 다양해지고 있다. 밀맥주는 막걸리와 느낌이 비슷해 우리 입맛에도 맞는 편이다. 이외에 흑맥주와 에일맥주 등도 함께 판매가 늘고 있다. ▶기사 더보기
지난해 국내에서 수입 맥주 매출이 시장 점유율 3위 맥주 기업인 롯데주류의 맥주 매출(약 950억 원)의 5배에 달하는 5000억 원대로 파악됐다. 2위인 하이트진로의 맥주 매출(약 8200억 원)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수입 맥주가 80여년간 이어져 온 독과점적 한국 맥주 시장 구도를 뒤흔들고 있다.
소주·위스키·와인 등 국내 주류시장이 최근 3년 연속 정체한 가운데 수입 맥주 덕분에 맥주 시장만 연 3~6%씩 성장하고 있다. ▶기사 더보기
맥주의 4대 재료인 맥아, 홉, 효모, 물 외에 맥주 잔이 맥주 맛의 '제5원소'로 꼽힐 수 있다고 맥주 전문가들은 말한다. 세계적으로 수천 가지 맥주 잔이 있고 그것을 비슷한 모양끼리 묶어도 10종 이상이다. 유리의 굴곡 하나가 잔 안에서 향기의 대류(對流)를 만든다.
맥주 잔은 그 모양에 따라 길쭉하고 잔 입구가 좁은 종류와 둥그렇고 입구가 넓은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자엔 보통 라거를 따라 마시는데, 좁은 입구 때문에 맥주가 혀 윗부분으로 바로 떨어진 뒤 목으로 흘러들어 라거의 시원한 탄산감을 극대화한다. 둥그런 잔엔 대부분 아로마(향)가 뛰어나고 맛이 깊은 에일을 따라 마신다. 잔 입구가 넓어 마시기 위해 잔을 기울였을 때 코가 안쪽으로 들어간다. ▶기사 더보기
온도에 따라
차가운 맥주를 제공하려고 잔을 얼려두는 맥줏집이 많다. 하지만 라거 계열 맥주는 5~10도 정도, 에일 계열은 10~15도 정도라야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맥주 잔을 얼리면 생기는 미세한 얼음 결정체가 거품 형성을 방해한다. 얼음이 녹은 물에 세균이 자랄 수 있어 위생상 좋지 않다.
'치킨'으로 대표됐던 맥주의 짝꿍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맥주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3C 법칙'이란 것도 있다. 맥주와 함께 먹을 음식을 고를 때 국가(country)·색깔(color)·조합(combination)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맥주 생산국과 그 나라의 음식이 어울리며, 맥주의 색이 짙을수록 맛·색이 진한 음식과 맞다. 단맛·신맛·쓴맛 등 맥주가 지닌 맛과 같은 맛을 가진 음식과 맞추거나 반대의 맛을 가진 음식과 대비시켜 즐기기도 한다. ▶기사 더보기
떡볶이와 에일맥주의 조화
'치맥' '피맥'에 이어 '떡맥'도 이슈다. 한여름 밤, 빨간 양념으로 무장한 떡볶이에 톡 쏘는 맥주 한잔 곁들일 수 있는 곳이 늘고 있다. 분식집이라기보다 펍(pub) 같은 느낌이다. 이런 가게들은 치즈, 마늘 후레이크 등 재료를 넣은 다양한 떡볶이와 함께 어울리는 맥주를 구비하고 있다. 떡볶이 별로 맥주를 고를 수 있도록 페일에일·필스너·스타우트·임페리얼 I.P.A. 등등 맥줏집 못지 않은 종류 수를 자랑한다. ▶기사 더보기
'국민 안주' 노리는 왕노가리
노가리는 두세 살 된 어린 명태를 말한다. 노가리는 예전부터 맥줏집에서 내기는 했지만 치킨·돈가스 등 더 비싼 안주에 밀렸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이런 분위기가 바뀌었다.
왕노가리를 처음 내놓은 건 을지로 3가 노가리 골목이다. '만선호프' 'OB베어' '뮌헨호프' 등 이곳에 몰려있는 맥줏집들은 30여 년 전부터 왕노가리를 냈다. 왕노가리를 방망이로 두드려 부드럽게 만든 다음 불에 살짝 구워 내는 방식이나, 라면 수프를 섞은 듯 자극적이고 얼얼한 매운맛이 나는 고추장과 마요네즈를 찍어 먹도록 함께 내는 것도 노가리 골목에서 시작돼 퍼져나갔다. 이곳 스타일을 따른다 해서 '을지 노가리'라고 써붙이고 장사하는 술집도 많다. ▶기사 더보기
가게에서 마시는 맥주
'가맥'은 구멍가게들이 탁자 몇 놓고 맥주를 팔면서 생겨난 전주 특유의 서민 술문화이다. 가게맥주의 준말이다. 70년대 중반 처음 시작했다는 영광상회는 없어지고 풍남문 앞 초원편의점이 제일 오래됐다고 한다. 전주엔 가맥 집이 300곳 넘는다. 가게 따라 북엇국, 닭발 튀김, 노가리구이, 매운 콩나물 수제비도 낸다. ▶기사 더보기
책과 함께 마시는 맥주
서울 연희동에 있는 '책 바(Chaeg Bar)'에 들어서자 가게 한가운데에 놓인 책장이 먼저 눈에 띄었다. 천장까지 닿는 이 책장에는 '책'과 '바'라는 가게 이름처럼 술병과 책이 함께 놓여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의 숲' 옆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보드카를 놔두는 식이었다. 메뉴판도 독특했다. 메뉴판 첫 페이지를 보면 시·소설·에세이·계간지 등으로 술을 구분해놨다. 시 메뉴에는 도수 높은 위스키 종류, 소설 메뉴에는 도수가 낮은 맥주류가 갖춰져 있었다. ▶기사 더보기
맥주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그냥 '술'이 아니다. 역동적인 이미지와 함께 젊음을 상징하기도 하며, 하루를 끝내는 위로와 휴일을 즐기는 여유를 뜻하기도 한다. 청량함으로 환희와 기쁨의 순간을 더해줄 때도 있었다. 최근에는 이런 맥주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면서 '개인의 취향'이 예전보다 더 많이 반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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