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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사 ▣/주마등

동경유학생 야구단

by 세월따라1 2009. 9. 30.

'무쇠 골격 될 저육(猪肉·젓가락처럼 마른) 소년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 시대 다다랐네 / (후렴) 만인대적(萬人對敵)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 / 절세영웅 대업(大業)이 우리 목적 아닌가.'

 

'황성신문' 1909년 7월 22일자에 실린 운동가 '소년남자'의 첫 소절이다. 동경(東京)유학생 야구단은 당일 옛 훈련원 연병장에서 치러진 서양인 선교사들과의 경기에서 이 노래를 응원가로 불렀다. 1909년 1월 대한흥학회를 결성한 동경유학생들은 여름방학 기간 모국방문단을 조직해 농촌계몽, 학예, 체육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와세다대 재학생 윤기현을 단장으로 25명의 유학생으로 구성된 야구단의 시범경기도 그중 하나였다.

 

 

▲ 1910년 2월 26일 황성YMCA와 한성학교의 경기장면.

한국 최초의 야구단은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hillip L. Gillett)가 창단한 황성YMCA 야구단이다. 베잠방이 차림에 짚신을 신고 경기를 치렀고, 글러브가 부족해 외야수들은 맨손에 헝겊을 감고 수비에 나섰다. 배트가 없어 절구공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선 선수도 있었다. 비록 장비는 허술했지만, 도입 직후부터 야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격구(擊毬), 상대방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며 겨루는 석전(石戰) 등 전통놀이가 있어 이질감이 덜했던 것도 야구 인기에 한몫을 했다. 황성YMCA에 이어 덕어(德語·독일어)학교, 영어학교, 관립중학교, 휘문의숙 등에서도 잇따라 야구단이 창단되었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의 시범경기에 쏠린 사회의 관심은 지대했다. 그들은 도쿄에서 일본 학생과 청국(淸國) 유학생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적이 있는 강팀이었다. '황성신문' 7월 25일자는 '기호학회(畿湖學會)에서 오찬을 제공하고 사회 신사와 학생, 서양 남녀가 성대히 회집하여 오륙백 인에 달한지라 운동의 경기는 아국 학생이 19점이요 서양 선교사가 9점이라 승부에서 이긴 아국 학생들은 운동가를 제창하고 만세를 삼창했다'고 보도했다.

군부(軍部)가 폐지되고, 사법권이 일본에 이양되는 등 온통 암울한 소식뿐이던 시기, 동경유학생 야구단의 승전보는 오랜만에 접하는 상쾌한 소식이었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개성·평양·선천·안악·철산 등 서북지방을 순회하며 시범경기를 펼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후 1910년 2월 26일 황성YMCA와 한성학교의 경기가 벌어지는 등 야구 열기는 고조되었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1937년까지 10차례 고국을 방문해 선진 야구 기술을 전파했다. 동경제대 박석윤, 와세다대 서상국 등은 자교(自校) 야구부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할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선동열·임창용 등이 일본에 진출하기 80여년 전 이들은 일본 야구계를 휘저었다. 1921년 제6차 동경유학생 야구단원 일부는 경기에 앞서 시국 강연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구류의 처벌을 받기도 했다. 야구는 또 하나의 애국운동 수단이었다.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원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29/20090929018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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