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묘역 21곳 정비… '삼각산' 이름 되찾고 유적 개발
무성한 잡초, 흐트러진 낙엽, 깡마른 흙이 드러난 헐벗은 봉분…. 묘비와 상석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는 쓸쓸한 이 무덤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의 장녀인 고(故) 안현생(安賢生·1902~1959) 여사가 잠들어 있는 안식처다.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영웅 안중근 의사의 장녀지만 안 여사의 일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8세 때 아버지를 잃은 안 여사는 13세까지 프랑스인 신부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다 13세 때 일제의 눈을 피해 제정러시아로 망명했다. 16세 때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이주해 불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해 6·25를 겪고 대구로 피란해 프랑스어를 가르치다가 수복 후 서울로 옮겨 생활하던 중 고혈압으로 서울 북아현동에서 58세의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여사는 21살에 결혼해 슬하에 두 딸을 두었지만 자녀들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장녀 안현생 여사의 무덤을 바라보는 강북구청 관계자들. 깡마른 봉분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다. /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여사의 무덤이 있는 곳은 서울 강북구 삼각산 자락.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미치지 않는 이곳 산자락엔 안 여사 묘소 이외에도 3·1운동 민족대표이자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孫秉熙·1861~ 1922) 선생, 만주신흥무관학교 창설자이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선생, 제헌의원인 신익희(申翼熙·1892~1956) 선생,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 부원장을 지낸 김창숙(金昌淑·1879~1962) 선생, 3·1운동 민족대표 이명룡(李明龍·1873~1956) 선생, 한일병합에 항거해 자결 순국한 김석진(金奭鎭·1847~1910) 선생,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낸 지청천(池靑天·1888~1957) 장군,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밀사로 참석한 이준(李儁·1859~ 1907) 열사 등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선열 묘소 21기와 광복군 17위의 합동묘소<62쪽 표 참조>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삼각산 자락에 있는 선열들 묘소는 대부분 찾는 이가 드문 ‘잊혀진 무덤’이다. 일부 선열 묘역과 봉분은 후손에 의해 깨끗이 단장되고 관리돼 왔지만 상당수 묘소는 돌보는 사람이 없이 벌초(伐草)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상 방치됐던 순국선열 묘역들. 이를 재단장하는 데 소관 자치단체인 강북구가 나섰다. 강북구청은 이준·손병희·신익희·조병옥·이시영·김창숙·이명룡·신숙·김병로·유림·김도연·양일동·서상일·신하균·여운형 등 15기의 묘역과 광복군 합동묘소로 향하는 진입로를 지난해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한 데 이어 여운형·조병옥 선생 묘역에 조경석을 쌓고 배수구를 설치하는 2차 작업에 착수했다. 비용은 18대 국회 기획재정위원인 지역구 출신 정양석(51·한나라) 의원이 배정받은 9억원의 예산으로 마련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사람에 대한 대접이 소홀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세요. 수십 년을 헤매 미군 유해를 찾아내고 결국 가족 품에 안겨주지 않습니까. 반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된 우리는 6·25를 치렀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적잖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선조들이 희생한 덕분에 지금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인데 요즘엔 지난 역사를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을 잊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강북구에 선열들의 묘역이 집중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 묘역을 재단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삼각산 자락의 일부 순국선열 묘역은 일반인들에게도 존재가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묘소가 안현생 여사 무덤과 광복군 합동묘소를 포함해 총 21기에 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묘소 21기의 위치를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삼각산 안팎을 뒤져 산재해 있는 묘소를 모두 찾아낸 사람은 김현풍(金顯豊·68) 강북구청장이다. 치과의사 출신으로 미아리에서 개업의를 하다가 출마, 민선 2기를 맡고 있는 김 구청장은 매일 아침 삼각산을 오르는 삼각산 매니아다. 그는 강북구청 건물 옥상에 삼각산을 향하도록 웹카메라를 설치, 집무실 모니터와 연결해서 업무 틈틈이 산 정상을 바라보며 일하고 있다.
김 구청장은 “나라가 있어야 민족이 사는 것 아니겠느냐”며 말을 꺼냈다. “저희 강북구엔 나라를 대표하는 명산이 있습니다. 인수봉·백운봉·만경봉의 3개 봉우리로 유명한 ‘삼각산’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에겐 삼각산(三角山)이란 이름보다 북한산(北漢山)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 ▲ 김현풍 강북구청장 / 삼각산에 산재한 순국선열들 묘역
김 구청장은 “알아봤더니 그 배경에 이마니시 류(今西龍)라는 일본 학자가 있더라”며 말을 이었다. “이마니시 류는 교토대학 교수로 ‘단군고(檀君考)’ ‘조선고사연구(朝鮮古史硏究)’ ‘백제사연구(百濟史硏究)’ ‘신라사연구(新羅史硏究)’ 등의 저술을 남긴 고대사학자입니다. 이 사람의 경력 중 주목해야 할 것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한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의 역사적 뿌리를 없애려는 의도로 일제가 만든 어용학회입니다. 그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으로 임명돼 삼각산의 유적을 조사해 1915년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 보고서의 이름이 ‘북한산 유적보고서’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 전까지 부아악(負兒岳), 횡악(橫岳), 화악(華岳) 등으로 불리던 삼각산의 이름이 북한산으로 굳어지게 됐습니다. 이제 이름을 되찾을 때가 됐습니다.”
김 구청장은 “북한산은 원래 이름인 ‘삼각산’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기운을 꺾기 위해 국토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개조했습니다. 경기도 군포 옆에 있는 ‘의왕(儀王)’에 날일(日)자를 넣어 ‘의왕(儀旺)’이라 바꾼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바꾼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민족의 기상이 어린 산 이름을 바꿔 민족의 기운을 꺾으려는 의도였습니다.”
김 구청장은 삼각산에 산재해 있는 선열들 묘역 21기를 하나로 잇는 순회도로를 내고 나아가 삼각산 전체를 살필 수 있는 일주코스를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삼각산 역사문화박물관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삼각산엔 12.7㎞에 달하는 북한산성과 13개의 성문, 그리고 임금님의 행차길인 ‘행군터’가 있습니다. 손병희 선생이 설립한 천도교 교육기관 ‘봉황각’도 삼각산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교육받은 483명의 인재 중 15명이 3·1운동을 기초한 33인에 포함돼 있습니다. 최남선 선생의 서원(書院)인 ‘소원서원’도 이곳 삼각산에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자리엔 지금 아파트가 들어섰지만요. 이 같은 삼각산의 역사유적을 개발하고 알리기 위해 일명 ‘북한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은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삼각산 유역은 외국 관광객도 관심있게 찾을 만한 문화관광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6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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