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막걸리가 서울에 시판되기 시작한 8일, 서울 시내 모든 대폿집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술꾼들이 몰려들어 도심지엔 밤 8시쯤에 막걸리가 동났다."
'1호 쌀 막걸리'가 세상에 깔린 1977년 12월 8일 서울의 밤거리 풍경이다. 애주가들은 '기대보다 싱겁다', '예전 맛이 아니다', '역시 쌀로 빚으니 마실 만하다'라고 품평하며 양은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당시 쌀 막걸리의 부활이 의료보험 실시, 수출 100억달러 달성과 함께 그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정도로 화제였다.
이전까지 전국 1520개 양조장은 정부 시책에 맞춰 14년 동안 옥수수나 밀가루로 막걸리를 빚어 왔다. 쌀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해 쌀 막걸리 제조가 허용된 것도 쌀 대풍작 덕분이었다. 1974년부터 서울탁주에 근무한 성기욱 서울탁주 전무는 "업계에선 1년 묵은 쌀을 고미(古米), 2년 묵은 쌀을 고고미(古古米)라 불렀는데, 당시 정부에서 고고미나 3년 묵은 고고고미로 막걸리를 만들 수 있게 허용했다"고 말했다.
당장 먹을 쌀도 부족할 때, 묵은 쌀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통일벼'다. 1971년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통일벼의 위력은 대단했다. 보통 벼는 이삭 하나에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가 보통이었다. 많을 때는 200~300개가 달리기도 했다.
통일벼의 보급은 1974년 쌀 생산량 3000만석 돌파, 1975년 쌀 자급(自給) 달성, 1977년 4000만석 생산 돌파 등 신기록 행진을 가능하게 했다. 공식적으로는 1949년 고시·배달·새나라·만승 등 4개 벼 품종이 광복 후 가장 처음으로 품종등록 됐지만, 쌀 막걸리 부활을 가능하게 했던 통일벼가 '대한민국 1호' 쌀 품종으로 손색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해마다 벼베기 행사에 참여, 쌀 증산을 독려했다.
통일벼가 국민을 배부르게 했지만, 오래지 않아 쌀 소비가 문제로 부각됐다. 1979년 135.6㎏이었던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0년 후인 1989년 121.4㎏로 떨어졌다. 이에 맞춰 1989년 삼양식품에서 출시한 것이 '대한민국 1호' 쌀라면이다.
2007년 6월 국세청 기술연구소는 '쌀 맥주(麥酒)'를 처음 개발해 국가특허로 등록했다. 100% 쌀이 원료라서 '미주(米酒)'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할 수 있다. 쌀 맥주까지 개발된 것은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75.8㎏(2008년)까지 떨어져 쌀이 남아도는 탓이다. 30년 전과 비교해 쌀을 절반가량만 먹게 된 시대라서, 앞으로도 쌀로 만든 '대한민국 1호'가 계속 탄생할 전망이다.
김정훈 기자 runto@chosun.com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24/20090924004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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