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츄가루 죡곰 쥬시요’ 대한제국 생활모습 생생
日 메이지시대인 1882~1910년 ‘조선어회화 책’ 74종 찾아
“내 졈방에셔는 외샹은 주지 아니허니 맛돈으로 사가시요.”
『일한통화』(1893)라는 회화 책에 나타난 문장이다. 여기서 ‘맛돈’은 ‘현금’을 뜻한다. 요즘 말로는 “우리 가게에서는 외상을 주지 않으니 현금으로 사 가시오”란 뜻이다.
1904년 회화책인 『최신일한회화안내』에는 “침치 내여라” “곳츄가루 죡곰 쥬시요”란 표현이 나온다. 130년 전만 해도 ‘김치’가 ‘침치’로 불렸다. 연세대 국문과 한영균 교수는 “김치를 침치, 또는 침채라고도 표현했는데 이는 ‘잠기다’는 뜻의 침(沈)과 나물·푸성귀를 뜻하는 채(菜)에서 유래한 것”이라며 “맛돈도 현금이라는 뜻으로 당시 소설 등에 나온 것을 본 기억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성씨의 연구 논문과 논문에 사용한 조선어회화 자료들을 구해 보고 싶다”며 “그의 자료 중에는 연구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내용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의 사회상이 엿보이는 표현도 많다. 1902년 편찬된 『실용한어학』이란 회화서에 나온 문장들이다.
“형님 한(*)분은 방금 일품벼슬 하(*)시고 또(*) 한(*)분은 참녕 벼슬노 게시고 동생한 나는 화류션 짓기를 바(*)와 공장의 두목이오 마주막 동생(*)은 각국으로 장사(*)단니오.”(“형님 한 분은 지금 일품 벼슬을 지내시고 또 한 분은 참녕 벼슬을 하시며, 동생 하나는 화류선(꽃 그림이 들어간 부채의 종류로 추정) 만들기를 배워와 공장을 경영하오. 막내 동생은 세계 각국으로 장사를 다니오”라는 뜻)
“그 친구난(*) 덕행(*)도 잇고 지식이 만어셔 향당에셔 가위 군자(*)라고 일컷소.”(그 친구는 덕행도 있고 지식이 많아 향당에서 소위 군자라 불리고 있소)
구한말에 이미 외래어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쓰인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비스겟도나 죰 가져오오”라는 표현이 당시의 회화 책(『한어회화』ㆍ1905)에 나온다. “비스킷을 달라”는 뜻이다.
조선어회화 책엔 대륙 진출을 위한 일본의 주도면밀한 준비 과정도 드러난다. 예컨대 임오군란 전후인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출판된 회화 책들은 ‘외교ㆍ교역’과 관련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 청일전쟁을 전후해 출판된 책들엔 식량ㆍ물자 조달과 관련한 대화나 적군의 동정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회화 등이 많았다.
조선을 강탈한 후인 러일전쟁(1904년) 즈음에는 경찰이나 철도원을 위한 회화서, 또는 토지 조사 목적이나 조선으로의 이주를 위한 회화서 등이 다양하게 편찬됐다.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내용도 자주 나타난다.
“일본병사(*)는 교육도 잇소 또(*) 애(*)국심이 잇스니 년젼년승하(*)기가 괴지아니한(*)단 말이요”(일본 병사는 교육도 받았고 애국심도 있으니 전쟁에 연승하는 것이 이상할 리가 없단 말이요)란 식이다.
성씨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기초 준비를 얼마나 치밀하게 해 왔는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조선어회화서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뿐 아니라 일본어 어법ㆍ표현 등이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규명했다. 이를 인정받아 23일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도쿄대 국어연구실 113년 만의 4호 박사다. 외국인으로선 첫 박사학위 수여자이기도 하다.
비즈니스서 군사까지, 말부터 배운 日 제국주의
74종 일본의 ‘조선어회화 책’ 들여다보니
"죠선에는 호랑이가 만히 잇소"
"예, 함경도는 만히 잇소"
"사람을 먹나"
"매년 수십 인식, 먹어요"
'조선 호랑이'를 소재로 이 대화체 문장은 115년 전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인들이 만든 어학 학습 책인 '조선어학독안내'에 실려있다. 섬나라 일본엔 야생호랑이가 살지 않아 실제로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당시 일본인들의 호랑이에 대한 큰 관심을 반영한 듯 하다. 중앙SUNDAY는 도쿄대 국어연구실 연구원인 성윤아씨가 지난 9년의 연구 과정에서 발굴해 낸 74종의 조선어회화책을 취재했다. 성씨가 발굴한 자료들은 1882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에서 간행됐다. 조선어회화책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일본이 시대·정치적 상황에 따라 조선어회화책을 어떤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펴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보도내용 전문.
일본 메이지 시대 때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조선어회화 책. 한글 표현 옆에 가다카나로 발음기호를 적고, 하단에는 일본어로 뜻풀이가 돼 있다. <1>옷차림에 관한 내용을 다룬 회화책, <2>생활 잡사를 소개한 『일한영삼국대화』, <3>무역 용어들이 나오는 『일로청한자재』, <4>러일전쟁 시기에 군인들이 휴대할 수 있도록 제작된 포켓용 『일로청한회화』, 조선어·일본어·중국어·러시아어로 실려 있다. <5>김치와 고춧가루 등 조선의 음식을 소개하고 있는 『최신일한회화책』. | |
요즘의 영어회화 책이나 다름없는 ‘조선어회화서’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때는 일본 메이지 시대 초기(1880년대)다.
당시 일본은 교역이나 상업에 이용할 목적으로 주로 회화책을 만들었다. 내용도 그에 맞춰 조선인을 만났을 때의 인사법과 풍습·음식·동물·자연환경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표현법이 주를 이뤘다.
1893년 『일한통화』에 나온 “남(*)의 압희셔 코 풀거나 춤 밧거나 하(*)면 실례가 되니 조심허오”(남 앞에서 코를 풀거나 침을 뱉으면 실례가 되니 조심하시오) 등의 표현이 한 예다.
1895년 출간된 『조선어학독안내』에는 ‘호랑이’를 주제로 한 ‘엽기적’ 대화체 문장들도 등장한다.
“죠션에는 호랑이가 만히(많이) 잇소.”
“예, 함경도는 만히 잇소.”
“사람(*)을 먹나.”
“매년 수십인식, 먹어요.”
또 『독습신안일한대화』라는 회화책에는 “이 박졔난 률셔인데, 이것은 져그번에 남산넘어에셔 잡은 놈이요”(이 박제는 다람쥐인데, 지난번에 남산 너머에서 잡은 놈이오)란 대목도 있다. 한자로 ‘밤 율(栗)’자, ‘쥐 서(鼠)’자를 써 다람쥐를 표기해왔음을 알 수 있다.
‘죠션에는 호랑이가 만히 잇소’ ‘사람(*)을 먹나’
이 시기 조선어회화 책에는 사람의 성격이나 평가에 관한 표현도 많다. 성윤아씨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들이 조선인과의 대화를 위해 사람의 성격과 평가를 표현하는 말들을 회화책을 통해 배우려 한 것 같다”고 설명한다.
1893년에 나온 『일한영삼국대화』라는 회화책에는 “밋친 사람(*)은 열업시 우슴만 자조 웃습늬다(미친 사람은 괜시리 웃음만 자꾸 웃습니다)” “저 사람(*)이 항당헌(황당한) 놈이요” “져이가 죠흔(좋은) 사람이요” 등의 표현들이 등장한다. 요즘의 영어회화 책과는 거리가 먼 표현이 많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조선의 실정과 사회상·풍속 등을 엿볼 수 있는 회화 표현들은 1880년대에 이어 1900년대도 두루 쓰였다. 1906년 회화책인 『독학한어대성』에 나오는 “일색(*)(一色) 소박은 잇소도 박색(*)(薄色) 소박은 업다하오”(미인을 소박하는 일은 있어도, 박색한 이를 소박하는 일은 없다고 하오) “남자(*)는 남(*)의 집 안방에 드러가지 못한(*) 법이요” 등이 그렇다.
110년 전 플랫폼이란 말 나와
1890년대 초기까지 주로 상업·교역을 위해 만들어지던 조선어회화 책의 표현법은 정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변화된 당시 한반도의 정치·경제·군사·산업 환경에 맞는 표현법들이 회화책에 자주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99년(일본 메이지 28년)엔 일본 기술로 한반도에 노량진과 제물포 간을 운행하는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만들어졌다.
이보다 6년 뒤인 1905년 발간된 『한어회화』라는 제목의 조선어회화 책엔 기차를 타는 장소를 나타내는 단어로 외래어 표기인 ‘부랏더호옴’(플랫폼·승강장)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독습신안일한대화』 중에는 “경부쳘도 개(*)통식에난(*) 복견궁 젼하(일본의 황족 중 한 사람)와 의양군 이재(*)각씨도 림쟝(臨場·참석)하(*)셨다 함니다”란 말도 나온다.
일본이 대륙침탈을 행동에 옮긴 러일전쟁(1904년) 전후엔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하게 잡기 위할 목적으로 경찰용 회화 책, 철도원 회화 책, 토지조사 회화 책, 이주용 회화 책 등을 따로 제작했다,
“광산 됴사(*)(조사)할 것이 잇서셔 츙쳥도와 강원도를 도라(돌아) 단길(다닐) 터이올시다” “경무쳥은 위생사무 까닭에 매우 밧분 모양이요” 등의 문장이 이 책들에 담겨 있다.
성씨는 “조선어회화 책은 근대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이 청나라나 러시아와 더불어 서구 열강과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기초 준비를 얼마나 치밀하게 해 왔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료”라고 말했다.
러일전쟁 후엔 군대 사기 높이기
러일전쟁 초기 여순전투 직후에 나온 회화서인 『최신한일회화안내』(1905)에는 “우리 병대(군대)가 여순(旅順) 을 삿다(포위했다)” “이 사람이 올흔배(*)(오른쪽 배)에 춍상을 어더잇소(입었소)”처럼 전쟁 상황을 설명하거나 부상 정도를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
식량·물자 조달, 적군의 동정을 파악하거나 군인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표현도 많이 발견된다.
“노국병사(*)는 보도 교육이 업수니 니기지는 까닭(*)이 업지요”(러시아 병사는 모두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이길 리가 없지요)(한어정규 1906)
러일전쟁 때까지만 하더라도 명령조와 반말 위주의 어구가 많이 등장하던 조선어회
화 책은 1910년 한일병합을 전후해 달라진다.
양반 계층이 일본인들에게 직접 조선어를 가르치는 일이 흔해지다 보니 다소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표현법이 늘어난 것이다.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력을 파견한 일본은 민중을 관리할 목적으로 조선인 성씨(姓氏) 계보를 부록으로 싣기도 했다.
조선어회화 공부 위한 문제집도
그동안 국내와 일본 학계에 알려진 조선어회화 책은 18세기 일본에서 조선어 역관을 교육하기 위해 펴낸 어학서인 『교린수지(交隣須知)』 『인어대방(隣語大方)』 정도였다. 조선어회화 책에 대한 연구 결과가 없다시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씨가 발견한 회화 책들은 일본인들이 130년 전에도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다양한 학습 방법을 사용한 것을 확인해준다. 지금으로 치면 통신학습에 해당하는 서신 회화 책(예컨대 『한어독습통신지』)까지 등장했다. 문제집 형식으로 돼 있는 이 회화 책은 연습문제에 대한 답을 미리 달아 편지로 보내면 학교 측이 첨삭지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조선어를 효율적으로 익히기 위해 일주일 속성, 50일 완성과 같은 제목을 단 조선어회화 책도 발견됐다.
조선인이 직간접적으로 출판에 참여하게 하는 조선어회화 책도 등장했다.
성씨는 “메이지 시대 초기와 달리 후기에는 조선인들이 직접 감수자나 공저자로 등장하는 조선어회화 책이 늘어났다”며 “이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만든 회화서라는 사실을 강조해 책의 권위를 더하기 위한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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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회화 책의 제목에 쓰이는 단어들도 메이지 시대 초기와 후반기의 차이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1880년대 초기에는 회화 책의 제목에 ‘한(韓)’ ‘선린(善隣)’ ‘교린(交隣)’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웃’이란 개념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에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병용(兵用)’ ‘종군(從軍)’이, 그리고 러일전쟁 시기에는 ‘실용(實用)’ ‘속성(速成)’ ‘실지응용(實地應用)’ 같은 단어가 포함된 회화 책 제목이 대거 등장한다. ‘이웃’ 개념은 사라지고 그들의 대륙침탈이라는 목적만 강조돼 있다.
한일병합 이후인 메이지 시대 후기에는 조선인을 위한 일본어 교재로 『일한한일신회화』 『일한한일언어집』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조선에 대한 지배가 완료돼 이제는 조선인이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배워야 하는 시대로 변했음을 책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다. 성씨는 “회화서의 제목에 쓰이는 단어만으로도 당시 일본의 조선이나 조선어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는 '아래아'를 비롯한 고어를 사용한 글자이나 웹 시스템의 특성상 표기가 용이치 않아 'ㅏ' 및 현대어로 표기 하였다.
상명대 일어교육과 출신인 성윤아(사진)씨는 한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2000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대 국어연구실 연구원 9년차다. 그는 ‘조선어회화서’ 연구로 23일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113년 역사의 연구실에서 네 번째 박사학위 수여자라고 한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이다.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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