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미(美)제국주의 앞잡이' 말 많이 들어… 성숙한 사람이라면 그걸 받아들여"
"잘해주면 북한이 핵(核)을 안 만들것이라는 남한의 로맨티시즘이 더 문제"
"북한도 변해야 하지만 우리도 순정을 보여야 문제가 풀릴 수 있어"
"북한이 변해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오. 하지만 우리도 좀 변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고 자존심만 있는데, 그걸 세련되게 다뤄야 해요. 우리 사회는 이런 여유가 없어요."
인요한(50·미국명 존 린튼)씨는 눈은 파랗고 189cm에 100㎏이 넘는 거구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국식'이다.
한말(韓末) 이 땅에 정착한 미(美) 선교사 집안 출신인 그는 21차례 방북했다. 북한에 결핵약을 지원해온 '유진벨' 재단을 형 스티브 린튼과 함께 이끌면서다. 북한의 로켓 발사로 온 세상이 시끄러울 때, 그를 만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그의 연구실에 앉자마자 나는 본론에 들어갔다.
- ▲ 인요한씨는“사실 두려워하는 쪽은 북한”이라며“좀 세련되게 북한을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주민들은 굶주리고 치료받지 못하는데 로켓을 날리는 북한 정권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상대방이 왜 저러는지 그쪽 입장에서도 봐야 합니다. 물론 안보는 철저하게 해야죠. 지난 정권 출범 초기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어요. '우리가 잘해 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까?'하고 물어요.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북한 사람이라도 불리한 상황에서는 핵을 만들 것이다. 우리가 잘해 주면 핵을 안 만들 것이라는 남한의 로맨티시즘이 더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그 뒤 정확히 2년 만에 북한은 핵 보유 선언을 했어요. 핵무기나 미사일을 만드는 것이 잘된 선택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립되고 겁먹은 이들에게는 생존 방식 같은 것이지요."
―보수층은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있습니다. 모든 걸 북한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과연 받아들여질까요?
"100년 전 호머 헐버트(Hulbert)선교사가 '신통치 않은 지도자(왕) 밑에서 참는 조선인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어요. 이북 사람들은 잘 참아요. 사실 불안하고 두려운 쪽은 북한입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고, 결국 일본의 핵 보유 명분을 주겠지요. 북한에 그걸 깨닫게 설명해야 해요. 무엇보다 현 상황까지 온 것은 약자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약자를 챙겨주는 척이라도 해요. 미국의 부시 전 정권은 '불도저'를 몰고 다녔어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들어가 '민주주의 하자'고 해서 제대로 된 게 있나요. 바깥에서 강압적으로 변화를 시키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뿐입니다. 북한 안에서 스스로 변화가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지난 10년 정권의 대북정책은 '퍼주기 식'으로 비판받았는데, 지금 상황에도 이쪽을 지지합니까?
"경제 제재와 고립을 통해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 정책이 무슨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생각이 짧은 것 같아요. 굶주린 북한의 유부녀 3백만 명이 아기를 업고 38선을 넘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총을 쏠 건가요? 붕괴를 유도하는 사람들은 정권 지배층 3%만 보고, 따라가는 주민 97%는 보지 않습니다. 통일이 됐을 때, 이들이 '우리가 어려울 때 왜 도와주지 않았나' 원망하면 우리가 이렇게 잘사는 것을 어떻게 합리화시킬 건가요. 그리고 '퍼주기'는 없어요. 서독이 동독을 도운 것에 비하면 그 36분의 1도 안 됩니다."
―정작 문제는 퍼주면서 질질 북한의 의도대로 끌려 다닌다는 것이겠지요.
"끌려 다니면 어때요. 나도 이북 일을 하면서 '미제국주의 앞잡이', 'CIA 첩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듣고 많이 지쳤어요. 처음 갔을 때는 '위대한 누구' '위대한 누구' 라는 말에 미칠 것 같았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성숙한 사람이면 그런 건 받아들여야지요. 누가 형이에요? 하지만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는 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북한의 썩은 관리들을 먹여 살려 계속 통치하도록 도와줄 거예요. 지금까지 북한 내에서 활동하는 전세계 NGO들이 이래서 모두 실패했어요. 유진벨도 그렇고…."
―유진벨은 60개의 북한 결핵퇴치기관을 지원하고 15만 명을 치료해줬다고 들었는데, 이제 와서 '실패'라니요?
"많은 사람을 도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고기만 줬지 물고기를 낚는 낚싯대를 주지 못했어요. 근본적으로 결핵약과 X레이 필름을 만들어내고, 그 의사들의 힘으로 결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해요. 성공사례는 장학금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학교를 졸업해 취업해서 홀로서기를 해야 성공하는 거죠. 이북말로 '자력갱생'하도록 가야 합니다. 그래서 개성공단이 가장 중요해요. 열쇠는 한국기업에 있어요.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능력을 키워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성 공단 폐쇄가 있었고, 현재 현대아산 직원 1명도 억류돼 있습니다. 북한이 항시라도 개성공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인데, 이런 상태에서 그런 교류를 계속해야 한다고 봅니까?
"우리 눈으로 보니까 그래요. 오히려 북한이 두려워하고 있어요. 코앞에서 대대적인 훈련(키 리졸브)까지 하니까 더 두려워 발광하는 거요. 생존을 위해서."
―원칙을 지키겠다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적인가요?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 원칙에는 금강산 사건이 작용했죠. 돌아가신 분에게는 미안하지만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 들어갔고, 쫓아오는 군인이 흥분했고, 그건 하나의 사고예요. 사고 처리로 해야지, 금강산을 폐쇄해버려요? 정말 큰 정치는 전(前) 정권의 잘한 것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먼저 매듭을 지을 문제라고 봅니까.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요?
"북한이 이걸 할 수가 없어요. 큰형으로 '다시 그런 일이 재발하면 영원히 닫겠다. 그러나 한 번만 믿어주겠다'고 말해야 합니다. 굉장히 복잡한 문제도 순정과 의리, 성의를 보이면 쉽게 풀릴 수가 있어요."
―당신은 21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해 말해본 적이 있나요?
"조심해야죠. 내정 간섭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외국인이니 적절치 않아요."
―반면 독일 의사 플로첸은 북한 주민의 참상과 인권 침해에 대해 많이 떠들었지요.
"내가 그에게 '당신의 얘기가 사실이라도 일인시위를 하고 떠들어대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한 적이 있어요. 방법론에서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가라고."
―북한 체제하에서 고통받는 주민들의 참상을 외부로 고발한 측면이 크지요
"오케이 오케이. 필요한데…. 저는 의사예요. 결핵이라는 병을 없애고 수질 오염에 따른 세균성 이질을 치료하는 게 목적이지요. 결핵이란 못 먹고 영양실조에 밀집돼 살면 공기로 전염돼요. 정상으로 먹으면 50%는 완쾌, 25%는 죽어요. 나머지 25%는 만성이 돼요. 이 만성환자들이 또 일 년에 열에서 열다섯 명의 환자를 만들어요. 이건 세계보건기구 통계예요. 우리는 암과 심장혈관으로 죽지만, 북한에서는 이런 전염병으로 매년 100만명씩 죽어요. 이제부터 서양 사람들이 대리로 왔다갔다할 게 아니라, 남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실제 북한에서 진료한 적이 있습니까?
"실제 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북한 의사가 환자를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지요. 북한 의사들은 X레이 필름이 부족해, 환자 위에 형광판을 놓고 투시해 봅니다. 방사선을 다 뒤집어써 10년쯤 하면 이들은 백혈병으로 죽어요. 본인들도 그걸 다 압니다. 북한의사들은 작은 예수들이에요. 나라면 북한에서 의사 못 할 것 같아요. 돌아와서 후배들에게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있겠나'하고 묻습니다."
―북한과 사업을 하는 이들은 통상 북한 입장에서 말하고 그 눈치를 보는 것 같더군요.
"글쎄, 제약은 있지만. 1997년 첫 방북 때 차로 이동하면서 북한 안내원이 '남조선이 앞섰다는 데 설명해보라'고 해요. '첫째는 박정희와 재벌 덕분이었다. 한때 나도 미워했지만 철들고 나니 고마운 사람이더라. 둘째는 16시간씩 일했던 한국 근로자들 덕분이다. 셋째는 근검절약하고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 덕분이다'. 이렇게 40분 설명을 다 듣고 나서는 '둘(줄) 잘 섰지 뭐. 남조선 아이들은 미국 뒤에'라고 해요. 그래서 '필리핀은 100년 전에 이미 미국 뒤에 줄 섰지만 지금 어떤가'라고 했지요."
전남 순천에서 출생한 그는 대학 1학년 때(1980년) 광주에 들어가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맡았고 이로 인해 '데모 주동죄'로 추방될 뻔했다. 그 뒤 정보과 형사들의 사찰 대상이 되자, '딱지'를 떼기 위해 문무대(병영체험훈련)에 일주일간 자진입소 하기도 했다.
"나는 '양키 양놈'이란 말을 들으면서도 미친놈처럼 한국을 짝사랑하는데, 우리 자식은 지 엄마가 한국사람인데도 나만큼 미치지 않았소. 난 한국 사람의 정(情)문화가 좋았어요. 내 어렸을 때, 가난할 때의 사람들이 좋았소. 북한 사람들을 보면 그런 정을 봅니다."
그립겠지만, 우리에게 그 가난한 시절로 돌아가 살라면 참기 어려울 것이다.
인요한
3대째 의료·선교활동… 대학 1학년때 동급생과 결혼
인요한은 명망 있는 선교사 집안 출신이다. 조부 윌리엄 린튼은 22세 때 한국에 와서 48년간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벨 선교사의 사위이기도 하다.
아버지 휴 린튼은 군산에서 태어나 전남의 도서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늘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84년 교통사고가 나 택시로 병원에 옮기던 중 숨졌다.
이때의 충격으로 인요한은 '한국형 앰뷸런스차량'을 1993년 고안 개발해 국내에 보급했다. 이 앰뷸런스 차량 한 대를 1997년 북한에 기부하면서 북한결핵사업이 시작됐다.
북한 주민들에게 결핵약을 보급해온 '유진벨' 재단의 회장직은 형 스티브 린튼(인세반)이 맡고 있다. 스티브 린튼은 미국 여성과 결혼해 미국서 살고 있다.
인요한은 광주민주화 운동 직후 추방 위기에 몰리자, 대학 1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만난 지 4달이 된 동급 여학생과 결혼을 감행했다. "우리 부모는 어려서 반대하고 처가에서는 국제결혼이라 싫다고 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같이 살겠다니 말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말이 편하다고 했다. "집에서 한국말을 쓰면 유교 문화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권위가 선다. 그런데 조선 여자가 얼마나 대가 센지 몰랐다"고 덧붙일 줄 안다.
그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1년 수련의를 하고 다시 돌아왔다. "적응하기 어려워 마치 군대 갔다 온 기분"이라고 했다. 외국인으로는 처음 한국 의사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미국장로교의 한국대표직도 맡고 있다.
최보식·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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