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성’을 기치로 내걸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인과 함께 사상초유의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그를 믿었던 민초들은 ‘배신감’에 빠져들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는 “우리는 왜 이리도 지도자 복이 없느냐”고 개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환갑의 나이를 맞는 동안, 청와대를 거쳐 간 대통령은 모두 9명. 그들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 과연 국민들에게 어떤 다짐을 했을까 되짚어보게 되는 요즘이다.
한결같이 “부정부패 척결” 외쳤으나…
1989년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졌던 ‘청문회 스타’이자, 재임기간 내내 도덕성에 대해서 만큼은 강한 자부심을 보인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200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무엇보다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부터 바뀌어야 한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사회 건강을 위해서도 부정부패를 없애야 한다”면서 특히 “사회지도층의 뼈를 깎는 성찰”을 촉구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실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돼야 한다”면서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가 정직하고 성실한 대다수 국민이 보람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먼 훗날 오늘의 우리를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기억하게 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지금 뇌물을 받은 혐의로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번째로 구속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소외지역 출신 대통령이 된 그는 정부수립 50년 만에 처음 이뤄진 여·야간 정권교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道)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지역 차별’을 없애겠다는 취임의 말과는 달리 편중인사로 실패한 정권으로 지목됐다. 또 재임 중에 아들 3형제가 모두 수사대상에 오르거나 구속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정부가 먼저 허리띠를 졸라맬 것이다. 국민은 더 절약하고 더 저축해야 한다. 사치와 낭비는 추방해야 하고 근로자는 더 열심히 땀 흘려 일해야 한다.” 취임사에서 ‘신한국’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정신적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경제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그는 96년 OECD 가입 목표는 달성했다. 하지만 성급한 자본시장 개방 등의 여파로 집권 말 IMF 외환위기를 맞아야 했다. 또한 재임시절 아들이 비리로 구속되는 첫 대통령이 됐다. 또 국가기강을 외쳤던 ‘신한국’ 은 유례없는 대형사건들과 조우해야 했다. 취임 무렵부터 구포 열차 탈선,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페리호 침몰, 충주호 유람선 화재,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등 초대형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해 민심은 흉흉했다. “기독교 장로인 김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의 불상을 없애 사고가 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5공과 같은 뿌리의 정권이라는 부담을 털어내려는듯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표방한 노태우 전 대통령.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나’, ‘본인’ 대신 ‘저’라는 표현을 사용한 인물이다.
노 전 대통령의 취임사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길었다. “위대한 국민의 민주적 선택으로 40년 헌정사를 통해 쌓여 온 갈등의 찌꺼기는 모두 씻겨졌다”며 국민들에게 ‘용서와 화합’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재임시절에 재벌 등으로부터 돈을 받아 수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가 5·18, 12·12 내란음모 사건 등과 함께 실형 및 추징금 2000억원대를 선고받아 국민께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어떠한 형태의 특권이나 부정부패도 단호히 배격하겠다. 높은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고야 말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민주주의’ 가장 많이 남발한 이는 다름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랬지만, 특히 전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본인’이라는 말을 유독 많이 썼다. 사상 첫 ‘대통령 구속’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그는 취임사를 액면 그대로 믿을 필요가 없음을 가장 잘 보여줬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수십억 또는 수백억원의 재산을 긁어모은 정치인이 있고 일부 부유층이 사치를 위해 낭비에 흐르는가 하면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했다”며 “이런 구시대의 잔행을 추방하고 참다운 민주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아가 “과거처럼 선동, 비리, 파장, 권모, 사술, 부정부패 등이 판을 치던 풍토 속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면서 “이런 폐습에 물든 정치인들에게 앞으로의 정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본인의 소신”이라고 못을 박았다.
최 전 대통령의 취임사는 유난히도 헌법 개정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 그는 10·26 이후의 과도기적 정치상황을 설명하며 “또 한번의 국가적 시련기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금후의 헌법과정에는 우리 헌정사의 과오를 깊이 자성하고 장래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또 지속성 있는 민주발전의 기틀이 되는 그러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전 대통령은 헌법 수호는 고사하고 군부의 초헌법적 힘에 밀려 스스로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10년 후에는 “우리 민족이 가야야 할 길은 오직 하나. 그 이념이 바로 10월 유신의 기본정신이다. 이 유신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아가기 위한 한국인의 사상과 철확의 확립이며 그 실천이다”며 ‘유신’의 정당성을 호소한다. 하지만 그는 취임사에서 13번이나 언급했던 이 ‘유신’에 의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박 전 대통령 역시 대통령 취임사의 레퍼토리인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 역시 취임사는 ‘말 뿐’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그대로 실천했다. 독재정치를 일삼았음에도 취임사에서는 “강력정치를 빙자한 독재의 등장도, 민주주의를 도용한 무능, 부패의 재현도 단연 용납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나아가 대통령의 지위에 대해선 “국민 앞에 군림하여 지배하려함이 아니요, 겨레의 충복으로 봉사하려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시대가 자신을 요구했다며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여타 대통령들과는 달리 윤 전 대통령은 “나같이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을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뽑아주신 국회의원들에게 송구하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린다”며 겸손을 마다 않았다. 그리고 취임사를 “드리고 싶은 말씀 너무도 많지만 오늘은 간단히 인사말씀으로 대신 하겠다”고 갈무리했다.
“4월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경제적 자유에 뿌리박지 않은 정치적 자유는 꽃병에 꽂힌 꽃처럼 곧 시들어버린다”며 정부의 최고 지향점을 “경제 제일주의”로 찍었다. 하지만 그는 헌정사상 역대 대통령 취임사 중 가장 짧은 취임사 만큼이나 짧은 집권으로 경제의 ‘경’자도 써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엔 시대적인 화두가 아니었던 탓에 취임사에서 ‘경제’라는 말은 단 한 번 등장한다. 대신 ‘반공’ 이데올로기가 취임사 전반에 나타나며, 북한 공산당을 ‘민족의 원수’와 ‘매국주의’로 규정하는 등 이승만의 취임사는 건국 이념에 중점을 둔 취임사로 평가된다.
“여러번 죽었던 이 몸이 하느님 은혜와 동포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하느님과 동포 앞에서…” 처럼 이 전 대통령은 유독 ‘하느님’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정의’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의 ‘백성들’에게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한다. 더욱 분투 용진해서 세계 문명국에 경쟁해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고 호소한다. 그러나 이 정권 스스로가 부정부패 정권의 상징이 돼버렸다.
“국민을 섬기겠다”는 MB, 1년 후 성적은?
역대 대통령들 공히 취임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우리’와 ‘국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들 단어를 41번이나 썼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말문을 연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 또한 ‘국민’을 수없이 반복했다(23회).
‘실용정치’를 표방한 이명박 대통령은 1년 전 취임사에서 2008년을 ‘선진화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한없이 위대한 국민을 섬겨 나라를 편안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정부가 국민을 지성으로 섬기는 나라, 경제가 활기차게 돌아가고 노사가 한마음 되어 소수와 약자를 따뜻이 배려하는 나라”로 그렸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추임새를 자주 넣으며(총 8회) 장문의 취임사에 호흡을 줬던 이 대통령은 “정치의 근본은 국민의 뜻을 받들고 국민의 고통을 들어줘 국민을 편안하고 살맛나게 하는 데에 있다”며 끊임없이 ‘국민’을 받들었다. 그러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통합하겠다고 다짐했다.
1년이 지난 후, 이 대통령은 그렇게 존경하던 국민으로부터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경향신문이 이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2월22일자)가 이를 잘 말해준다. 국민들은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80.3%),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도 대통령에게 있다’(69.8%), ‘인사정책이 잘못됐다’(72.0%), ‘살림살이가 나빠졌다’(52.6%), ‘국정에 국민 여론을 반영하지 않는다’(69.1%)고 응답했다. 나아가 ‘현 시점에서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한다면 이 대통령에게 투표하지 않겠다’(64.9%)고까지 했다.
<경향닷컴 고영득기자 ydko@khan.co.kr>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101519131&code=9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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