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포장길 옆에 이정표가 붙어 있다. ‘도피안사 300미터’. 도피안(到彼岸)이라 함은 강의 이쪽 기슭에서 저쪽 기슭으로 간다는 말이니, 불교에서 세속을 떠나 차원 높은 지혜와 평화의 경지에 다다른다는 말이다. 절이 있는 곳은 강원도 철원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의정부 지나 포천을 지나고 철원까지 두 시간이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철원이 있다. 맘만 먹으면 당일로 충분히 답사가 가능한 땅이다. 거기에는 역사가 있고 자연이 있고 민초들의 삶이 살아 있다. 게다가 만물이 부활하는 봄까지 왔으니.
후삼국이 열린 이래 천년 세월을 두고 깊은 갈등과 슬픔과 설움을 두루 겪은 서글픈 철원이다. 그런 땅 한복판에 도피안의 공간이 있으니, 하늘과 대기와 땅에 배어 있는 슬픔을 위로하는 절이다. 천지사방에 봄비가 자욱했던 봄날이었다.
#1 안식하여라 - 도피안사(到彼岸寺)
천년 전 도선국사가 불자 1500명을 이끌고 절을 세우니, 그 절 이름이 도피안사였다. 도선에 얽힌 전설이 숱하게 많으니, 천년 후 이 철원 땅이 남과 북의 비극의 전쟁터로 변하리라는 사실을 그가 예언한 것이 분명하다. 평야가 피로 범벅이 될 정도로 격전을 치른 이 땅에 ‘피안으로 가는 공간’을 그가 만들어놓은 것이다. 역설적일 정도로 적확한 이름을 가진 절 도피안사. 지난해 6.25 전쟁 때 실종된 국군 유해들을 수습해 영결식을 치른 곳도 바로 이곳 도피안사였다.
도선과 그 추종자들이 절을 세울 때, 철불을 만들었으니, 철조비로자나불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도선이 원래 절터를 잡은 곳은 부근에 있는 수정산이었다고 한다. 불상을 싣고서 수정산을 향하는데, 한 고갯마루에서 불상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사방팔방을 찾아 헤매었지만 찾을 수 없던 불상이 한 양지바른 터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이 바로 지금의 도피안사터였다. 도선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철불이 앉은 자리를 본당터로 삼고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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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왕문 틈으로 보이는 요사채. 새로 지었지만 고졸한 미학에 충실하다.
1000년 세월이 흘러 1959년 이곳 15사단 사단장인 이명재 장군이 꿈을 꾸었다. 부처 한 분이 땅 속에 묻혀 “답답하다”고 하고 있고, 한 여인이 그를 바라보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장군이 민가에 들렀다가 꿈에 봤던 그 여인을 보고선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인의 안내로 전쟁 때 폐허가 된 도피안사터를 샅샅이 뒤졌고, 그리고 철불을 찾아내 절을 재건했다. 기이하지 않은가, 인연이란. 지금 도피안사 대적광전에는 이명재 장군의 초상이 봉안돼 있다.
- ▲ 대적광전 앞에 있는 고려시대 삼층석탑
이렇듯 작은 절 하나에 오랜 역사와 인연이 숨어 있다. 국사가 세우고 장군이 재건한 도피안사는 1985년 군에서 민간으로 관리가 넘어와 21세기를 맞았다. 한때 민간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철불은 온통 금분을 입히고 수염에 머리를 칠하는 천박한 욕정으로 치장되었으나, 지금은 말끔하게 치장을 벗고 온전한 옛 모습으로 앉아 있다. 대적광전 앞에는 고려시대 양식의 3층석탑이 서 있다. 기단과 각 층의 석물들이 정교하지 않고 어딘가 둔탁하고 비틀어져 있기에 오히려 정이 가는 돌탑이다. 철불과 석탑은 각각 국보 63호와 보물 223호로 지정돼 있다. 돌아 나오는 길, 봄꽃들이 활활 타올랐다.
#2 인민의 고혈(膏血)을 짜내던, 노동당사
잠시 틈입했던 피안에서 벗어나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 산사를 가득 채웠던 향긋한 봄내음, 빗줄기 맞으며 대기 속에 퍼뜨렸던 땅 냄새가 아직 남아 있지만, 이제는 현실의 역사를 볼 차례다. 북쪽으로 길을 이으니 ‘백마고지’라는 낯선 이정표가 스쳐갔다.
▲ 말 그대로,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은 노동당사
백마고지 가는 길에 민통선 통문이 나오고 그 직전 오른편에 노동당사 폐허가 서 있다. 들어는 봤나, 노-동-당-사. 남북 분단 이전에 노동당사가 있는 지역은 북한 땅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은 이곳에 노동당 철원군당을 만들고 당시로는 최신 디자인으로 노동당사를 지었다. 이곳이 구 철원이고 지금의 철원은 그때 철수한 주민들이 새로 만든 도시, 즉 신철원이다.
기록에 따르면 건물을 만들 때 북한은 1개 리(里)마다 백미 200가마를 강제로 거뒀고 인력과 장비 또한 강제로 동원했다. 건물 내부 공사는 노동당원들만 동원해 시행했다. 어찌나 견고하게 지었는지, 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구 철원 시가지는 “직립해 있는 모든 것들”은 폐허가 됐지만 노동당사만은 오늘날처럼 번듯하게 잔존했다. 양민 수탈과 고문, 학살 기타 등등의 일들이 노동당사에서 자행됐다. 당사 뒤편 방공호에는 훗날 인골 수백과 실탄, 철사줄이 발견됐다. 그 쓰라리 쓰린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이 건물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2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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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폭격에도 살아남은 견고한 건물이다. 보라, 저 탄흔들을.
보라, 저 음습한 구조물을. 건물 앞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건물은 기둥마다 벽면마다 탄흔투성이다. 그 구멍구멍마다 서성대는 원혼들이 보이지 않는가. 몇 년 전만 해도 건물 속을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때에도 걸음을 뗄 때마다 등 뒤가 서늘해 무서울 정도였다. 김정일, 언젠가 이 폐허가 된 당신네 흔적을 두 눈으로 봤으면 좋겠다.
노동당사에서 나와 길을 이으면 ‘두루미평화관’이라는 마을회관이 나온다. 회관 앞에는 이곳 출신인 월북 소설가 이태준의 흉상이 서 있다.
뭔가 시비 걸 일은 아니지만, 기시감, 혹은 데자부라고 있지 않은가. 꼭 언젠가 와본 듯한 그런 느낌. 그렇다. 조금 아까 본 노동당사와 계단으로 오르는 파사드(facade: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며 그 위의 아치형 창문 3개, 그 위 옥상층의 돌출부까지 쌍둥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버렸으니, 아래 사진을 보고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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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퉁(?) 노동당사, 두루미평화관
#3 철원 평야
그리고 평야였다. 평화였다. 빗줄기가 잦아지더니 천지사방이 안개다. 멀리 있던 인공구조물들은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추고 들판에 느티나무 한 그루와 전봇대 몇 개 달랑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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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 들판에 안개비가 내렸다. 천년 동안 이 땅을 휩쓴 분쟁과 갈등이 봄비 속에 침묵했다.
#4 격전지, 백마고지
무슨 말을 더 하랴.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곳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중공군 제38군과 국군 9사단이 전투를 벌여 열흘 동안 스물 네 번이나 주인이 바뀐 격전지다. 마지막 승자는 국군이었다. 이 전투의 승전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훗날 휴전협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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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 전적비에 봄비가 내렸다. 까치 소리가 유난했다.
다른 말은 하지 말기로 하자. 전적비 아래에 있는 기념관에는 1970년 중국 ‘당대역사연구소’가 펴낸 ‘백마고지 전역’ 보고서가 이렇게 인용돼 있다.
“…군단의 전 장비를 소련식으로 교환하고, 화력을 증강하여 1년 여의 훈련을 마친 후 1952년 10월에 출동, 군단의 전병력으로 한국군 제9사단과 미 제2사단이 고수하고 있는 백마고지를 공격하였다. (중략) 이 전역에서 한국군 제9사단은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서지 않으며, 투혼을 발휘하여 후일 백마사단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 사단은 전후에 월남전에 참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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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 중국측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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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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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 기념관에 있는 병사 부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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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 기념관 벚꽃길
#5 한탄강은 흐른다
백마고지 촉촉한 대지 위에는 새하얀 산벚꽃이 활짝 피었다. 며칠 후면 저 꽃잎들이 혼백들처럼 하늘하늘 하늘로 날아가 꽃비가 되겠지. 퍽이나 감상적인 마음을 품고서 길을 돌린다. 돌아오는 길목에 한탄강을 보았고, 여름이면 래프팅족들로 만원을 이룰 얕고 폭넓은 직탕폭포도 보았다. 검은 현무암 절벽을 뚫고 흐르는 한탄강은 강물마저 검다. 계절이 맞지 않아 텅빈 번지점프장, 임꺽정 무리들이 웅거했다는 한적한 고성정도 보았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바야흐로 만물이 부활하는 계절에 비까지 뿌려주었으니, 이 얼마나 찬란한 봄나들이인가. 햇살처럼 포근한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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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 평원을 가로지르는 한탄강. 이 땅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글·사진·영상=박종인 기자 seno@chosun.com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17/20090417002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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