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과 새해를 맞는 목욕탕은 붐비게 마련이다. 겹겹의 몸의 허울을 벗고 묵은 삶의 때를 씻어내는 목욕은 마음의 더러움도 함께 흘려 보내는 경건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목욕은 휴식이기도 하다. 서서 하는 샤워는 오롯이 각성과 새 출발을 위한 행위이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탕욕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송글송글 땀을 흘리는 증기욕은 휴식과 건강을 위한 행위다. 목욕은 또한 사교의 시간이다. 서로의 등을 북북 밀어주고 온탕·열탕·냉수폭포를 오가며 장난치고 찜질방 바닥에 한데 어울려 잠을 자면서 유대를 쌓는다.
최근 반신욕과 족욕 카페라는 새로운 풍속도 유행 중이고 숙박업소에선 앞다투어 월풀 욕조를 들여놓는다. 놀이·치료의 기능을 내세우는 워터 파크식 온천 개발도 한창이다. 따끈한 목욕탕이 생각나고 제대로 한 꺼풀 씻어낼 시간의 여유가 그리운 연말이다.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한 목욕은 종교 의식이었다. 신성한 물로 영혼을 씻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요단 강에서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기독교의 초기 기록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는 족욕의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슬람 교도들은 성전에 가기 전 손·발·다리·얼굴·머리를 흐르는 물에 씻어야 하고, 힌두교도들은 성스러운 갠지스 강에 몸을 담가 죄와 세상의 더러움으로부터 정화돼 새롭게 태어나고자 한다.
목욕의 나라, 터키와 일본
기원전 4세기께부터 공중목욕장이 있었던 그리스는 과학적 사고가 발달하여 물로 몸을 씻으면 죄나 부정함이 사라진다는 식의 관념을 믿지 않았다. 히포크라테스는 목욕의 의학적 효능을 밝혀내 치료에 이용했고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 앉아서 부력의 원리를 발견(“유레카!”)했다. 그리스 문화를 이어받은 로마는 건강뿐 아니라 사교와 쾌락의 장으로 목욕을 발전시켜 나갔다. 습식·건식 목욕과 마사지·약탕·향탕 등 거의 현대에 필적하는 다채로운 목욕 기법들이 개발됐으며 발달된 상하수도 시설에 힘입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현대보다도 훨씬 많은 물 소비량을 과시했다.
그러다가 혼욕·매춘 등 점차 퇴폐적인 목욕 문화가 번성하고 너나없이 하루 종일 목욕탕에서 시간을 보내는 등, 고대 로마는 목욕으로 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때 850군데에 달했던 당시 욕장 가운데서도 ‘카라카라’ 유적은 12만4000㎡에 목욕객 2000명을 수용하는 엄청난 규모로 잘 알려져 있다.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 가운데도 300m×700m에 달하는 초대형 목욕탕 겸 수영장 ‘쓰라 쓰랑’이 남아 있다. 10세기 중엽 돌계단으로 둑을 쌓고 2㎞에 달하는 둘레에 호위병들을 빙 둘러 세우고 3000 궁녀와 함께 왕이 목욕을 했다고 한다. 소년 시절 골리앗과 맞서 싸우던 다윗이 나이 들어서는 여인 바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이나 훔쳐보며 욕심을 부렸다더니, 극에 달한 문명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보통 ‘목욕탕’ 하면 떠올리는 나라는 아무래도 실크로드의 종착역, 터키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터키탕’이 퇴폐 업소의 대명사로 알려져 곤혹스럽기도 했는데, 원래 이름은 ‘하맘’이다. 전통 이슬람 도시에는 수크(시장)·칸(여관)·하맘(목욕탕)이 반드시 갖춰져 방문객을 맞는다. 하맘은 높은 반구형 천장에서 자연광과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 원형 구조로 돼 있으며 대리석 찜질·때밀이·마사지·거품 목욕으로 이어지는 풀코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진정한 목욕의 왕국은 화산이 여전히 활동 중인 일본 열도다. 일본의 온천은 규모도 대단하지만 붉은 진흙, 검은 모래 찜질 등 다양한 테마로도 유명하며 료칸(여관) 등 전통문화와 결합하여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유난히 목욕을 좋아하고 매일 탕목욕하는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 목욕은 ‘씻는다’보다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다’는 의미가 크다. 특히 추운 겨울 난방 시설이 변변치 않아 몸을 데우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는 목욕이 필수였다.
가릴까 말까, 벗지 않는 목욕
일본 대중탕, 하면 혼욕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요즘에는 남탕·여탕이 분리된 경우가 더 많고 혼탕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노인층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탕 안에서는 모두들 수건을 접어서 머리에 얹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인데, 탕에서 나오면 수건으로 반드시 앞을 가리고 다닌다. 사실 일본뿐 아니라 외국인들이 보기에 우리나라의 특이한 목욕 습관 가운데 하나는 벗은 몸을 전혀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아랍권을 비롯해 아시아 나라들에서는 타인과 함께 벌거벗고 목욕하는 문화가 드물고, 강이나 공동 목욕장에서는 옷을 입고, 혹은 가슴이나 허리 이하에 천을 둘러 가리고 씻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남녀 혼욕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16세기 터키의 점령지였던 헝가리에도 ‘퓨도’라는 목욕탕이 발달했는데, 터키와 마찬가지로 욕탕 안에서는 남녀 모양이 약간 다른 앞치마 같은 가리개를 둘러 묶는다. 의료 목적의 온천휴양지가 발달한 독일에서도 개인 부스에서 샤워를 하거나 탕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을 때는 타월로 몸을 적당히 가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제대로’ 가려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옷을 벗고 알몸이 된 이상, 다시 천 조각으로 몸을 가리는 시늉을 하느니보다 당당히 벗고 다니고 타인의 몸에 고의적인 눈길을 주지 않는 예의를 지키는 것이 더 품위 있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이수영 객원기자 uchat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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