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傾城之色" 중국이 탄복한 그녀, 천하 바람둥이 왕족을 꿰차다
“일등 송도기생, 이리 오너라.” 이렇게 부르면 당연히 황진이가 쪼르르 달려올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황진이보다 훨씬 언니면서 중국 사신들이 조선의 경국지색이라고 불렀던 여인이 있다. 송도(개성) 자하동의 선녀라고 해서 이름이 ‘자동선(紫洞仙)’이다.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미인이지만 황진이처럼 튀는 행동을 많이 하지 않아서 살짝 감춰져 있던 기생이다. 연말에 송도에서 망년회를 열어 ‘미스 조선’을 뽑으면, 황진이 대신 이 여인이 월계관을 쓸 가능성이 높다. 이번 ‘미인별곡’에서 이 여인을 필자의 옆자리에 앉히려고 했더니, 그녀가 선약이 새끼줄처럼 엮여 있다면서 내뺀다. 세한 속에서 피어날 러브스토리가 잡힐 듯 달아나서 애간장이 타는 중이다. 송도기생 향우회라도 하면 슬쩍 끼어드는 수밖에 없겠다.
‘미인별곡’은 옛사람을 만나는 일이지만 반드시 옛날 이야기는 아니다. 옛사람이 오늘의 감성에 스며들어 함께 호흡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필자로서 내가 하는 일은 이미 여러 겹으로 쌓여 변별력이 없어진 어떤 시간을 불러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그 시대를 호흡하게 하는 것이다. 문을 여는 것, 이것이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이다. 타임캡슐의 뚜껑을 열고 순간이동을 하지만, 굳이 우리가 그때의 모습을 흉내 내서 갖추고 잠입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생각과 기분을 가지고 그 풍경과 사건들을 음미하고 즐기자는 것이다.
이번에 가보게 될 시간은 15세기 초반이다. 조선 왕조가 개창한 것이 1392년이고 조선 역사의 허리에 해당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 1592년이다.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에 즉위한 연도가 1400년이다. 15세기 초반은 조선이 막 새롭게 시작하여 안정된 사회 기틀을 갖춰가는 초창기였다. 왕국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고려’의 향수와 그림자는 남아 있었고, 왕권은 불안하고 제도적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 문물제도가 마무리되는 때를 성종(재위 1469~1494) 대로 본다. 그러고 보면 15세기는 신생왕국의 불확실성과 에너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시기였다고 할 만하다. 왕조가 쿠데타를 통해 개창은 했으나, 왕족 내부의 질서도 공고하지 않아 권력투쟁이 잦았고 또 유학자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이 시대 여인들은 어땠을까. ‘어린 조선’은 아직 유교적인 윤리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기에, ‘패륜(悖倫)’으로 일컬어지는 부모형제 간의 살육과 범죄, 어이없는 하극상, 문란한 성생활 따위가 자주 물의를 일으키며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여성들도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표현하며 들끓는 세상을 살아낸다. 몽골족 국가인 원나라는 1368년 망하기 이전까지 이 땅의 여인들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상당한 규모로 징발하여 강탈해갔다. 그런 고려의 백성을 이어받은 조선 왕조는 당연히 ‘여성 부족’을 포함한 인구 감소에 시달렸을 것이다. 따라서 군역(軍役)과 생산(혹은 조세)의 기반이 되는 백성의 숫자를 늘리는 일이 현실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왕실의 경우 왕권강화를 위해서도 다산(多産)이 절실했기에 수많은 여인과 관계가 오히려 권장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태종과 세종의 자손들로 이뤄진 당시의 ‘종실’ 남자들은 엽색과 풍류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한편 그 엽색과 풍류의 대상이 되었던 여인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신분상승 코스인 왕가의 핏줄들을 꿰는 것이 천국의 계단처럼 보였을 것이다. 임금이나 왕가 척족과 신하들이 자유연애를 하는 여성을 저마다 섭렵하다가 서로 ‘중복’되어, 겹동서로 손가락질을 하게 되는 상황도 빚어졌다. 성종 때의 어우동(?~1480) 스캔들은 그런 사회적 풍경의 절정이었다. 하기야 성종 또한 궁녀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명기 소춘풍을 만나려고 미복(微服)을 하고 밤마다 궁궐 담을 뛰어넘지 않았던가.
자동선(紫洞仙, 1431(?)~?)은 그 무렵의 여인이다. 송도 태생의 기생으로 이 고장 출신인 황진이에 비하면 70년 정도 앞선다. 황진이는 조선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기생으로 손꼽혀왔다. 황진이는 저명인사와 스캔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인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점이 그녀를 유명하게 하였지만, 자동선은 중국의 사신이 한번 보고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로다’는 신음소리를 자아내게 할 만큼, 글로벌한 공인을 받은 미인이었다. 그 사신은 본국에 가서 그 사실을 전파하여 다음에 조선에 가는 사신에게 꼭 그녀를 한번 보고 오라고 충고해줄 정도였다. 1974년 일간신문에 ‘명기열전’을 연재했던 정비석은 이 시리즈를 책으로 묶으면서 제1권에 황진이와 함께 자동선을 실었다. 송도기생의 양대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두 여인을 나란히 엮은 것에는 자동선이 황진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빼어났다는 함의를 담지 않았을까.
자동선과 황진이에 대한 당시 남자들의 열광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조선 초기 송도가 지니는 도시 이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송도(현재의 개성)는 조선이 넘어뜨린 왕조인 고려의 왕도(王都)이며 개경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송악산이 있는 도시라고 해서 송도라고도 불렸다. 한양의 선비들에게 이 도시는 묘한 우월감과 권력무상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조선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이곳은,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 가을 풀)로 가득 차는 폐허를 실감나게 들여다보는 장소였고,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 목동의 피리소리)에 부친 것을 보고 새로 돋아난 권력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거울 삼는 수행의 오디세이가 되기도 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는 옛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는 여행 붐이 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1477년 봄날에 성현·채수·허침·안침·조위 등 선비들이 서로 뜻이 통하여 송도를 여행했고, 닿는 곳마다 각자 돌아가며 시를 지은 <유송도록(遊松都錄)>을 남기기도 했다.
한양에서 바라보는 송도는 이런 곳이었다. 쓸쓸한 옛 도시의 정취는 무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아직 채 지워지지 않은 옛 영화의 체취도 느끼게 했다. 우선 권력이 오래 머물던 곳이니 자연히 미인이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남남북녀(南男北女)라도 말도 있는 만큼 아랫지방과는 다른 걸출한 미색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사내들의 은근한 기대감도 잠복해 있었을 것이다. 송도기생의 명성은 이런 배경 속에서 초기 조선을 잠 못 이루게 했다. 자동선의 등장은 어쩌면 송도라는 아우라에 힘입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그 시대의 두 남자를 만나보러 가자. 한 사람은 서거정(1420~1488)이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시에 문과 을과 3위로 급제했다. 3년마다 치르는 전국 임용고시에서 인문계 6등(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을 뽑았다)을 했다는 얘기다. 그는 대사성을 지내고 조선 초기 왕권강화의 공을 세운 양촌 권근의 외손자였던 점이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또 그의 누이는 훈민정음 창제, <용비어천가> 창작에 공을 세운 최항에게 시집갔다.
서거정은 호를 사가(四佳), 혹은 사가정이라고 불렀다. 네 가지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밝혀놓은 글이 보이지 않아 추측해볼 도리밖에 없다. 17세기 사람이지만 김창흡의 시에 ‘사가’가 나온다. ‘佳水佳山亭亦佳… 三佳亭上逢佳客.’ 아름다운 물과 아름다운 산, 그리고 아름다운 정자, 거기에 아름다운 객이 만났으니 ‘사가정’이라는 것이다. 사가정역은 중랑구 면목동에 있고 사가정길은 동대문구 답십리에 있으니, 서거정의 향기는 서울 일대에 아직도 풍미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조선시대 최초로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왕을 섬겨서 45년간 조정에 봉사했고 23년간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았고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했던 조선 초기의 파워 엘리트였다. 그는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에 통달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인이기도 했다.
서거정에게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효령대군의 다섯째 아들인 영천군(永川君) 이정(李定, 1422~?)이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아들로 셋째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가 넘어간 뒤 불교에 심취하여 불경 강론에 매달렸던 사람이다. 거친 정치 격변기에도 묵묵히 독서와 활쏘기를 하며 자아를 깊이 감추고 살아 91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런 아버지의 처세술을 이어받았음일까. 차세대 왕재(王才)로 주목을 받던 똑똑한 영천군 또한 정치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고, 천하를 쏘다니는 바람둥이로 일생을 보낸다. 막강한 종실의 위세를 무기로 삼아 엽색(獵色)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또한 역대 왕들은 그의 이런 일탈이 역모(逆謀) 걱정을 덜어주었기에 가능한 한 방조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인과(因果)가 있는 것일까. 이 영천군은 나중에 조선 최대의 풍기문란 스캔들을 일으킨 어우동의 시아버지가 된다. 서거정은 두 살 아래의 영천군과 친밀하게 교유한 흔적이 시에 보인다. 수원으로 떠나는 영천군에게 이런 시를 쓴다.
아름다운 기생이 겹겹으로 붉게 에워싸고는(佳妓重重紅作圍)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며 왕손의 옷자락 다투듯 당기면서(快覩爭挽王孫衣)
한 번만 웃어주세요, 그리고 왕손이여 머물러주세요(但願一笑王孫留)
떠나는 왕손과 헤어지는 일은 원치 않아요(不願一別王孫歸)
인생은 자고로 만나기가 어려운 법(人生自古會合難)
무산 운우(황홀한 정사)를 실컷 즐겼지만(巫山雲雨猶盡歡)
원앙 휘장 안에 봄밤은 짧아라(鴛鴦帳中春宵短)
그리움 끝이 없어 눈물만 흐르네(相思無盡淚闌干)
-수주행(水州行), 영천귀공자 이정에게 주다, 서거정
서거정의 이 시는 탕아처럼 떠도는 영천군의 비위를 신나게 맞추고 있다. “수원 가시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니 기대하고 가십시오.” 그야말로 풍류 그득한 ‘영’비어천가(영천군이 뜨다)다. 어여쁜 기생의 목소리를 내가며 친구의 행복예감을 돋우는 서거정의 재기발랄한 시문은 비교적 막역하는 벗으로서 부러움의 표현과 풍자가 뒤섞인 듯한 느낌이 든다.
한편 영천군은 서거정의 시에 관한 한 ‘팬’이라고 할 만했다. 그는 양주의 원루(院樓)에 걸린 시 한 편을 읽었다. 그러고는 감탄하면서 그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이 시를 보니, 분명 서거정의 솜씨다.” 나중에 그는 다시 와서 읽어보고는 “세상에 인재가 많은데 어찌 그 사람에게서만 시가 나올 수 있으랴” 하고 그 글을 지웠다고 한다. 시는 강희안의 작품이었다.
이 일화에서 영천군이 서거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 작가 정비석 선생은 비교적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서거정과 영천군이 함께 송도로 가서 자동선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때를 1448년(세종 30년)으로 잡고 있다. 이때 서거정의 나이는 29세, 영천군은 27세였다. 작가는 서거정이 이 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 독서휴가)를 받아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거정이 사가독서를 받은 것은 1451년(문종 1년)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꽃 지는 어느 봄날 개성을 다녀온 적이 있음은 분명하다. 영천군이 그곳에 갈 때 서거정은 이런 시를 써준다.
서루의 명월은 응당 나를 기억하리(明月西樓應憶我)
낙화유수가 사람 마음 어지럽게 했지(落花流水使人迷)
…
다시 유람하면 내 기분이 죽처럼 진할 텐데(我興重遊濃似粥)
돌아가 함께 등산하고 싶어라(若爲歸去忝攀躋)
-‘송경(松京)에서 옛일을 생각하면서 영천경(永川卿)을 보내다’ 7수 중에서, 서거정
서거정은 첫 벼슬로 사재감직장을 받았고 이후 집현전박사, 경연사경을 거쳐 1447년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로 승진했다. 그 뒤 임금의 배려로 1451년 특별휴가를 받는다. 그 무렵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소문 하나가 있었다. 명나라의 급사 장녕(張寧)이 조선의 연회에 참석하여 자동선이란 기생을 눈여겨보고는 “참으로 경성(傾城)의 자태”라고 감탄했으며, 돌아가 본국에 그 얘기를 전파해 중국에서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서거정은 장녕을 만나본 뒤 그를 이렇게 품평하고 있다. “급사 장녕은 그 문장은 가히 진가유(명나라의 사신으로 서거정이 대인군자로 평한 사람)에 백중하다 하겠으나 언행에 있어서는 억지스러운 곳이 있었다. 하지만 군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언행이 억지스럽다는 것으로 봐서 그에 대한 불쾌감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장녕이 “경성의 자태”라고 말한 것은 놀랍다. 이 말은 한무제 때 협률도위(協律都尉:음악을 관장하는 벼슬)로 있던 이연년(李延年)의 시에 나온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북쪽에 미인이 있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을 위태롭게 하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어찌 성이 위태로워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모르리요만 미인은 다시 얻기 어렵도다).”
이연년은 이 시로 자신의 누이동생을 황제에게 소개한다. 이 여인이 무제의 만년에 총애를 독차지하였던 이부인(李夫人)이다. 자동선이 중국 황제를 사로잡은 이부인에 필적할 만하다고 했으니 보통 칭찬이 아니다. 언행이 억지스럽다고 표현한 것은, 이 말을 두고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서거정은 자동선을 만나기 위해 송도로 가기 때문이다. 야심만만한 정치가이자 시인으로 떠오르던 별이던 이 남자가 ‘경성지색’이라고까지 일컬어진 자동선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서거정은 송도의 자하동 영선루(迎仙樓)에서 자동선을 처음 보았다. 희디흰 얼굴에 곱고 깨끗한 콧날, 부드러운 눈매는 지상에서 늘 보아오던 인간의 모습을 넘어 있었다. 이름을 자동선(紫洞仙)이라 한 것은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이 고을 수령이 지어준 것이었는데, 한 치 틀림이 없는 자하동(중국의 신선마을)의 선녀였다. 자태만 고운 것이 아니라 검무(劍舞)와 거문고 솜씨, 그리고 시문에 서예까지 21세의 나이에 어떻게 완벽한 문예를 한 몸에 섭렵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서거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 최고의 시인을 눈앞에 뵙게 되니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하여 무슨 인사부터 드려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사가(四佳) 어른의 별가(別佳)라 할 만한 시를 한 수 읊겠습니다.”
봄을 찾아 작은 다리 서쪽을 건너니(尋春來渡小橋西)
떨어진 붉은 꽃, 말발굽에 달라붙는데(零落殘紅襯馬蹄)
숲 너머 숨은 새들, 시상이 떠오르는지(隔林幽鳥多才思)
푸른 산을 다스리듯 제풀에 우는구나(管領靑山自在啼)
-봄날 청파(靑坡)에서 노닐면서, 서거정
“오오, 그대가 이 시를 기억하고 있단 말이오?”
“잔홍(殘紅, 남은 붉은 꽃잎)이 말발굽에 붙는다는 표현이 제 심장이 떨릴 만큼 극미(極美)하옵니다.”
“내가 이 고도(古都)에 와서 이런 얘기를 듣다니, 정말 뜻밖의 일이외다.”
“숲 속에 숨은 유조(幽鳥) 하나가 지저귀는 것이라 여겨주옵소서. 청산을 어찌 작은 부리 하나로 찍어올릴 수 있겠사옵니까?”
“허허. 그대가 이토록 시에 밝으니 내가 오히려 두려워지는구먼.”
“나리의 술노래도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읊어볼까 합니다.”
봄날 성의 고운 술은 어린 거위같이(春城美酒黃鵝兒)
봄바람에 살랑살랑 잔물결이 이는구나(春風鱗鱗生細漪)
나는 지금 홀로 삼백 잔 따라마셔(我今自酌三百杯)
가슴속의 불평스런 마음 씻으려는데(湔洗胸中不平懷)
…
남아 생전 반드시 때를 만날 터이니(男兒生前會有遇)
장부라면 죽은 뼈도 헛되이 썩지 않네(丈夫死骨非徒朽)
요순시대 멀어졌으니 어찌하리(唐虞世遠吾奈何)
술 앞에 세 번 외치고 미친 노래 부르리(對酒三叫歌狂歌)
-술 앞에서 노래함, 서거정
이 시를 읊자 서거정은 껄껄 웃었고 둘은 어느샌가 포옹을 하고 있었다. 술잔을 든 채 두 사람은 영선루 동쪽으로 돋아오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운우지정을 맺고 함께 평생을 같이하리라 다짐한다. 한양으로 돌아오며 그는 천하의 명기가 스스로 다소곳이 그를 맞아준 일이 꿈만 같았다. 한 여인을 위해 목숨과 삶쯤은 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성지색은 한 사람의 성(城)을 기우뚱하게 할 만큼 현기증나는 아름다움이었다.
며칠 뒤 영천군이 그가 그린 산수도에 제발(提拔)을 붙여달라고 찾아왔다.
그대는 내게 그림을 그려봐 달라고 여러 번 가져왔지(多君貽我畵圖看)
종일토록 벽 사이에 두고 한가로이 집어드네(盡日閑拈半壁間)
한번 강호를 바라보니 천만 리에 이르고(一望江湖千萬里)
청산이 어디란 말인가, 이 집이 산인데(靑山何處是家山)
-영천군이 산수도를 준 것에 감사하며, 서거정
영천군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역시 사가정은 재치가 넘쳐요. 그림보다 ‘시가산(是家山)’ 세 글자가 더욱 압도하니 말이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소이다. 군(君)이 제게 이렇게 많은 그림을 베푸시니 고맙기 한량없습니다.” “알아주는 이에게 그림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제 복입니다. 그림이란 무릇 기예가 아니라, 뜻을 전하는 전신(傳神)이니 탁월한 감식안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소?” “그림값을 해야할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어 없겠습니까?” “허허, 왜 없겠소? 내가 본시 강호를 좋아하는 뜻은 강호에 숨은 바람과 물결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술잔에 마음을 찍어 풍류도(風流圖)를 그릴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떻겠소?” “하하, 역시 나리의 봄뜻(春情)에는 못 당하겠습니다. 제가 한 아이를 보아두긴 했습니다만….”
서거정은 개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청초하고 파리한 여인 하나를 떠올린 것이다. 청교역 부근에서 만난 청교월(靑郊月)이란 기생이었는데, 영천군은 서거정에게서 이 여인을 소개받고는 무척 흡족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영천군이 청교월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서달성이라는 사람이 그에게 이런 시를 읊었다.
청교의 버들은 푸르러 마음만 아픈데(靑郊楊柳傷心碧)
자하동의 노을은 말 그대로 짙구나(紫洞煙霞盡意濃)
영천군은 그의 시가 청교월과 관련된 것인 줄은 알겠는데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그는 서거정을 찾아간다. “청교의 버들이 푸르러 마음만 아프다는 게 무슨 뜻이오?” “청교역에는 버들이 많이 피어 있는데 이별이 잦으니 상심이 많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청교월과는 어떤 관련이 있소?” “청교에 뜨는 달이라 함은 아무래도 슬프게 창백한 기운이 있으니, 파리한 여인과 사귀는 일은 상심을 부르는 일이라고 언질을 주는 듯합니다.” “오호, 그렇소? 그렇다면 자동연하는 무엇이오? 그것이 무엇이기에 끝까지 진하다는 말이오?” “아무래도 송도의 자하동에 피는 안개를 말하는 듯합니다.” “자하동이라? 그러면 혹시 일전에 중국 사신이 경성지색이라고 말했던 그 자동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오?” “…….” “자동선이 그렇게 사람을 흡족하게 하는 데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 “허허, 사가가 이렇게 과묵해진 건 처음 보았소. 자동선을 내게 소개해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것이오?” “아닙니다. 그럴 일이야 뭐가 있겠습니까? 왕실의 종친이 원하는 상대라면 어찌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서달성이란 친구가 내게 와서 굳이 그런 시를 읊는 것에는 까닭이 있을 법하오. 나 또한 자동선이 궁금하던 참이었소. 나와 함께 그 여인을 만나러 가는 건 어떻소?” “하하, 알겠습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그녀가 서거정을 괴롭힌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를 데리러 갈 날을 보고 있던 차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당시 종실의 위세는 만만치 않았다. 천첩이나 관비 소생일지라도 종실의 혈통으로 인정이 되면 종친부의 작첩을 얻어 사족(士族)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어떤 가문이라도, 그리고 상대가 비록 원하지 않는다 해도 종실이 단자(單子)를 보내면 바로 혼인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 때이니 영천군이 의욕을 보이는 순간 그녀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얼마 뒤 서거정과 자동선은 다시 만났지만 서로 아는 척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친구인 영천군에게 여인을 소개해주고 월하빙인(月下氷人)처럼 서로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선은 얼핏 눈물을 보였지만 서거정은 외면한 뒤 친구를 바라보며 껄껄거렸다. 자동선은 이후 영천군의 애첩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의 사인(舍人) 김식이 찾아와 장녕이 감탄하고 간 ‘유명한 자동선’을 찾았다. 이미 군(君)의 첩실이 된 상황이라 부르기가 어려워 예관(禮官)이 다른 예쁜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러자 김식은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이 자동선이라면, 장녕이 그렇게 칭찬했을 리가 없소이다. 얼른 진짜 그 여인을 데려오시오.” 당황한 예관은 영천군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자동선을 제천정(濟川亭)으로 데리고 왔다. 김식이 그녀를 보더니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과연….”
김식에 대해 서거정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는 7언과 4운을 잘했고 필법과 화격도 높고 묘했다. 하지만 행동은 절제할 줄 몰랐다.” 서거정은 그 후 오랫동안 혼자 자동선을 그리워했지만 어떤 표현도 할 수 없었다.
강 위의 봄, 어디서 찾을꼬(江上春歸底處尋)
초록다홍의 소녀시절, 한탄이 흘러나오네(綠嬌紅小恨難禁)
사람 사이 이 같은 이별 해마다 같지만(人間此別年年似)
올해는 비녀 가득 눈 내려 부끄럽네(羞殺今年雪滿簪)
-‘봄을 보내다’, 서거정
밤 깊이 설색이 어지럽도록 희더니(夜深雪色爲渾白)
새벽엔 햇살 끌어와 살짝 붉어지네(曉引朝暉欲軟紅)
백 년 동안 창이 밝았다가 어두웠다가(百歲窓明窓暗裏)
이불 쓰고 삐딱하게 앉아 시 짓는 늙은이(擁衾危坐一詩翁)
-‘지창(紙窓)’, 서거정
이런 시 속에서 회한이 슬쩍 지나갈 뿐이다. 자동선은 종실에 들어간 뒤에는 현숙한 여인으로 지냈던 듯하다. 그녀의 자취가 사라진다. 하지만 영천군은 여전히 바람둥이로 살았고 그 이후에도 많은 여인을 첩실로 삼는다. 두 사람은 공히 수양대군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았다.
서거정은 그보다 세 살 더 많은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절로 갈 때 함께 수행해서 우정을 쌓았다. 1453년 김종서 장군을 죽이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처형하는 소용돌이에도 그는 깊이 고개를 꺾고 세조를 보필하는 세력으로 거듭났다. 또 영천군은 ‘머리’ 없이 음란한 나비가 되어 꽃을 찾아다닐 따름이었다. 그런 가운데 자동선은 돋아난 사랑을 가만히 접은 대신 종실의 첩으로 부귀를 누리며 그 시절을 살아나갔다. 행복했을까? 그녀가 나의 데이트 초청에 응하면 한번 슬쩍 물어볼 참이다.
http://news.joinsmsn.com/article/482/5011482.html?ctg=1200&cloc=joongang|home|newsli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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