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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사 ▣/이런일 저런말

“中 남방 끌려간 고구려 유민, 인구 1000만 먀오족의 조상”

by 세월따라1 2011. 1. 10.
“서기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 중 중국 남방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현재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 인구가 5번째로 많은 먀오(苗)족의 조상이다.”

10여 년 동안 먀오족과 우리 민족 간의 관계를 연구해 온 김인희 전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전임연구원(43)이 최근 연구결과를 담은 저서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푸른역사)을 펴냈다.

먀오족은 현재 중국 구이저우(貴州) 성과 윈난(雲南) 성, 후난(湖南) 성 일대에 걸쳐 분포하는 민족으로 중국 내 800만 명, 동남아와 미주 등 200만 명 등 약 10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특히 저항과 독립성이 강해 호주 인류학자인 게디스(1916∼1989)는 “세계 역사에는 끝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끝까지 이겨낸 두 개의 민족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먀오족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윈난 성 동남지역의 먀오족은 청나라 초기까지 1000년 동안 자치권을 누렸다.

연구의 시작은 2000년 그가 먀오족 마을을 방문했다 남성들이 고구려의 궁고(말을 타기 편하도록 엉덩이 부분이 튀어나온 바지)와 비슷한 ‘쪼우’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다. 말을 타지도 않는 중국 남방의 소수민족이 고구려인의 궁고를 입고 있었던 것.

중국 남방의 소수민족 먀오족에는 고구려와 비슷한 복장이나 풍습이 유난히 많다. 주변 민족과 달리 다발의 새 깃털로 머리를 장식하는 점(왼쪽)도 고구려 무용총 벽화와 닮았다. 사진 제공 김인희 씨

 

 

 

 

668년 9월 당나라 장수 이적은 고구려 보장왕 등 20만 명을 끌고 갔다. 이후 유민들은 영주(현 라오닝 성 차오양 시)와 내주(산둥 성 옌타이 시 라이저우) 등에 머물게 했다가 중국 각지로 보내졌다.

김 전 연구원은 역사서 ‘구당서(舊唐書)’와 먀오족에게 전승돼 오는 사시(史詩), 노래, 치마에 새겨진 문양 등을 종합해 영주와 내주에서 출발한 고구려 유민들이 각각 서부 먀오족과 동·중부 먀오족의 뿌리가 됐다고 분석했다.

 

서부 먀오족 치마에는 그들의 조상이 건너온 황허와 창장 강 등 2개의 강을 상징하는 띠가 있고, 구이저우의 다른 강까지 건너간 먀오족의 치마에는 강을 상징하는 3개의 띠가 있다. 유민의 후손들은 조상들이 살던 곳을 잊지 않기 위해 고구려 궁궐 도성의 모양을 문양으로 만들어 장식했고, 이주경로를 담은 노래를 지금까지도 부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구이저우 동남의 먀오족(동부 먀오족)들이 망자를 위해 부르는 분건곡(焚巾曲)에는 당나라가 산둥에서 배를 타고 평양을 공격했을 때를 묘사한 듯한 부분도 나온다.

 

먀오족과 고구려 유민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른 증거들도 있다.

 

다른 소수민족 얘기는 송나라 이전 문헌에 나오지만 먀오족만이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는 점, 남방에서 먀오족만이 쌀과 벼와 비슷한 말을 사용하는 점, 주변 부족과 달리 난생신화를 가진 점, 이례적으로 새 깃털 다발로 머리를 장식하는 점, 시신을 집에 묻어 장례를 치르는 점, ‘광이기’라는 책에 후난 성 서부 일대에 ‘고려’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점, 고구려 유민이 남방으로 끌려간 후 후난 성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는 점 등이다.

김 전 연구원은 “중국 남방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은 약 10만 명으로 추산된다”며 “당이 고구려 정체성을 말살할 목적으로 ‘강하고 힘 있는’ 사회 중추 세력을 끌고 갔기 때문에 먀오족 내에 고구려 문화가 짙게 남아있게 됐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Culture/3/07/20110110/338175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