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한국의 장수 브랜드 10]<1>동화약품 ‘까스활명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가 뭘까. 이 질문의 답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96년 한국기네스가 인증한 국내 최고(最古) 브랜드인 활명수다. 액상 소화제인 활명수는 출시 이후 118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품의 이름과 상표(부채표) 등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활명수가 출시 이후 한 세기 넘게 국민의 사랑을 받는 원동력을 들여다봤다.
○ 19세기 제품이 지금도…장수 브랜드 ‘5관왕’
활명수는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 궁중 선전관이던 민병호 선생이 개발했다. 선전관은 임금을 곁에서 보필하는 무관 직책이지만, 민 선생은 평소 의약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궁중 전의에게서 전해들은 비방(秘方)과 양약의 장점을 결합해 한국의 첫 소화제인 활명수를 만들어 냈다.
지금은 소화불량이 큰 병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급체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빨리 먹고 많이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 때문이다. 침술과 탕약 외에는 병을 고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던 당시 활명수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활명수는 118년 동안 국민 소화제로 자리를 굳히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계속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제품 특성을 바꿔가면서 장수 브랜드 자리를 굳힌 것이다. 1960년대 탄산음료가 국내에 도입된 이후에는 탄산 특유의 청량감을 원하는 소비자가 늘었다. 그래서 1967년 발매된 제품이 까스활명수다. 소비자들이 보존제로 처리한 의약품에 불안을 느끼자 2011년부터 모든 활명수 라인업에 ‘100% 무(無)보존제 생산’을 선언했다.
○ 활명수 판매로 독립자금 지원까지
동화약품은 ‘제약 외길’을 걷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한국 기업들이 1970, 80년대 여러 분야로 신규 진출할 때도 제약업이라는 한 우물만 팠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에서는 다른 어떤 기업보다 진취적인 면모를 보였다. 활명수 판매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 게재된 광고에 따르면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이었다. 이는 설렁탕 두 그릇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고가였다. 이렇게 번 돈의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갔다.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 연락책으로 삼은 ‘서울연통부’는 서울 중구 서소문로 동화약품 본사에 설치됐다. 책임자는 민강 동화약품 사장이었다. 민 사장은 독립운동 때문에 두 차례 옥고를 치르다 결국 48세에 숨을 거뒀다. 동화약품은 민 사장 외에 5대 사장인 윤창식 선생과 윤광열 명예회장 등 3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활명수의 장수 비결을 연구한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화제 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좋은 제품명으로 초기 선점한 것이 활명수의 가장 큰 장수 원인”이라며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세로 회사를 운영한 경영진의 자세도 제품의 장수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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