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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사 ▣/이런일 저런말

‘인류 최후의 날 저장고’ 전세계 곡물 씨앗 11년 만에 6배 늘었다

by 세월따라1 2019. 11. 9.
노르웨이 북극 노아의 방주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 가보니...

올해 종자 입고 끝나… 내년 2월 씨앗 대규모 반입
창고 3개 중 1개 포화, "내년에 두 번째 창고 연다"
유일한 반출 사례 ‘시리아 종자’는 지난 8월 모두 반출

               
지난 10월 19일 낮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오른쪽 건물)와 북극해./ 조홍복 기자


‘저 일렁이는 북극 바다가 지구온난화로 해빙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난달 19일 오후 ‘인류 최후의 날 저장고’로 불리는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Svalbard Global Seed Vault·SGSV)’ 입구에서 멀리 차디찬 북극해가 보였다. 노르웨이령(領) 스발바르 군도(群島)는 위도상(북위 74~81도) 북극권에 있다. 북극은 지구의 기후변화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렌즈’라고 한다. 북극은 최근 20년간 평균 기온이 4~5도 상승해 지구 평균 기온보다 5배 이상 빠르게 기온이 치솟고 있다. 그 여파가 인류 최후의 씨앗이 언 땅에 묻혀 있는 스발바르에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중이다.

해수면보다 130m 높은 산 허리에 자리한 SGSV 입구에서 지난해 8월 세상을 뜬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인류 멸망을 원치 않는다면 200년 안에 지구를 떠나라. 온난화로 언젠가 지구는 (뜨거운) 금성처럼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은 최근 133년 동안 0.85도가 올랐다. 마지막 빙하기 때보다 10배 정도 빠른 속도라고 한다.

씨드 볼트(Seed Vault)는 ‘씨앗 금고’란 뜻. 돈을 은행에 맡기듯, 전 세계 주요 식량 종자를 보관한다. SGSV는 스발바르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 섬의 행정 중심지 롱이어비엔(Longyearbyen) 마을 숙소에서 걸어서 1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곳이었다. 낮 기온은 영하 4도. 체감 기온은 영하 10도 이상 떨어졌으나, 북극의 날씨치고는 버틸만 했다. 한국의 1~2월 날씨와 비슷했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 입구. 직원들이 종자보관 상자를 나르고 있다./ 스발라르 국제종자보관소 제공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 입구. 직원들이 종자보관 상자를 나르고 있다./ 스발라르 국제종자보관소 제공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에서 관리챔임자가 종자보관 상자를 보여주고 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 제공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에서 관리챔임자가 종자보관 상자를 보여주고 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 제공


녹지 않는 영구동토층이 60%를 차지하는 ‘동토의 왕국’ 스발바르 롱이어비엔에서 지난달 18~23일 엿새 동안 머물렀다. 국제 협약으로 전쟁이 불가하고 씨앗을 영하의 상태에서 항상 보관하는 영구동토층이 있는 ‘지구 상에서 가장 안전한’ 스발바르 씨앗 창고가 과연 최근 급격한 기후변화에도 안정성이 유지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롱이어비엔은 2000명 이상 거주 주민 기준으로 인류의 최북단 마을이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2313㎞)보다 오히려 북극점(1338㎞)이 더 가까운 사실상 북극이다. 한반도 직선 길이(1178㎞)를 감안하면 롱이어비엔에서 북극점이 얼마나 가까운지 짐작이 된다. 2002년 세계 열두 번째 북극 과학기지로 탄생한 우리나라 다산과학기지가 스피츠베르겐 섬 북쪽에 여러 나라의 북극 연구기지와 함께 있다.

스발바르 행정중심지 롱이어비엔. 지난 10월 20일 오후 3시34분쯤인데 벌써 어둡다./ 조홍복 기자
스발바르 행정중심지 롱이어비엔. 지난 10월 20일 오후 3시34분쯤인데 벌써 어둡다./ 조홍복 기자


극지의 태양은 사라지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밝아온 태양빛은 오후 3시쯤만 돼도 점점 그 빛이 옅어졌다. 10월 말부터 내년 3월까지 24시간 사위가 어두운 흑주(黑晝)가 이어진다. 햇빛은 저편 깊숙이 숨어 있었다. 중천에 뜨지 않고 하늘의 낮은 가장자리만 맴돌고 말았다. 대낮에도 석양빛으로 하얀 북극의 설산을 붉게 물들였다. 여름 밤 대낮처럼 환한 백야(白夜)가 고개를 내미는 것과 반대되는 현상이다. 체류 기간 눈에 띄게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었다. 빛이 완전히 물러나기 전에 SGSV 관계자들은 올해 마지막 임무를 끝내야 했다.

롱이어비엔에서 만난 한네스 뎀페볼프 세계작물다양성재단(GCDT) 수석과학자는 "SGSV 목표는 전 세계 작물 유전자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SGSV는 1980년대부터 노르웨이 유전자센터가 설립을 주도해 탄생하게 됐다. 국제연합(UN) 산하 GCDT가 기금 2390억원을 투입해 SGSV를 세웠다. 2008년 2월 문을 연 SGSV의 운영은 북유럽유전자자원센터(NordGen·노르젠)가 맡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와 노르젠이 종자 보관을 책임진다. 그래서 종자 보관은 무료다.

‘씨앗의 방주, 유전자원 최후의 보루, 인류 최후의 금고.’ SGSV의 여러 별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최대 규모 유전자은행인 SGSV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홍수, 식물 질병, 전쟁, 화재 등 각종 사태에 대비해 식량 종자 멸종에 대비한다. 한네스 뎀페볼프씨는 "후손들에게 지금의 식량 작물을 그대로 물려주자는 것"이라고 했다. 전 세계 1750개의 유전자은행이 다양한 작물의 씨앗을 보관 중이다. 궁극적으로 SGSV는 이 모든 유전자은행의 ‘쌍둥이 씨앗’을 확보하고자 한다.

롱이어비엔에서 만난 노르젠 소속 아스문드 아스달(가운데)씨와 사라 린드크비스트(오른쪽)씨./ 조홍복 기자
롱이어비엔에서 만난 노르젠 소속 아스문드 아스달(가운데)씨와 사라 린드크비스트(오른쪽)씨./ 조홍복 기자


노르젠 소속 아스문드 아스달 SGSV 운영·관리 책임자와 사라 린드크비스트 SGSV 소통 매니저는 슬로바키아 종자 입고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슬로바키아는 올해 씨앗을 맡긴 마지막 국가였다. 앞서 폴란드와 수단 등이 ‘씨앗 은행’의 ‘씨앗 예금주’가 됐다. 최근에는 루마니아도 자국 종자를 내년 중에 SGSV로 보내기로 계약을 했다. 둘은 "시설 관리자 1명을 빼고 내년 2월까지 SGSV에 상주하는 직원은 없다"며 "내년 2월 대규모 종자가 반입된다"고 말했다. 종자 창고는 총 3개다. 이 중 1개는 포화 상태라고 한다. 아스달씨는 "아마도 내년 2월에 두 번째 창고에 처음으로 종자 상자를 쌓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 직격탄 맞아... 2017년 창고에 물 흘러들기도
겨울비에 야생 순록 집단 폐사, 빙하 감소에 북극곰 수난
"씨앗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게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SGSV는 200년 후를 내다보고 만들어졌다. 해발 130m 지점에서 수평으로 120m 깊이 터널을 파고 그 끝에 창고 3개를 조성했다. 핵폭발과 리히터 규모 6.2 강진, 소행성 충돌에도 견디게 강화 콘크리트로 감쌌다. 발아(發芽)를 막기 위해 영하 18도를 유지한다. 전력이 끊기거나 벽체가 무너져도 영원히 녹지 않는 영구동토층이 자연 상태로 영하 3도를 유지해 씨앗이 훼손되는 일이 없다.

영구동토층으로 형성된 스발바르 행정 중심지 롱이어비엔 거리 모습./ 조홍복 기자
영구동토층으로 형성된 스발바르 행정 중심지 롱이어비엔 거리 모습./ 조홍복 기자


2015년 9월 처음으로 반출된 종자는 시리아산 곡식 씨앗이었다. 유일한 종자 반출 작업은 올해 마무리됐다고 한다.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는 SGSV에 맡겼던 종자 샘플 11만6484점을 세 차례에 걸쳐 지난 8월을 끝으로 모두 인출했다. 모로코와 레바논에서 씨앗을 뿌리고, 앞으로 안전한 시리아에서 다시 파종을 시도한다고 한다. 이후 시리아는 SGSV 에 종자 재입고를 추진할 계획이다.

저장 곡물 씨앗은 11년 만에 6배 늘었나 있었다. 현재 ‘씨앗 금고’에는 한국·북한 등 78개 나라와 연구소 등이 맡긴 전 세계 식량 작물의 씨앗 품종 6007개가 철통 보안 속에 보관돼 있다. 밀·쌀·보리·콩·땅콩·옥수수·수수·감자·고구마·깨 등이다. 품종별로 최대 500개 씨앗이 들어가는 포장 샘플은 110만8500여점에 달한다. 2008년 개관 당시 18만 7000여점보다 11년 만에 6배쯤 늘어난 것이다. 샘플은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있다. 세계 곡물 품종의 3분 1이 SGSV에 잠들어 있다. 씨앗 수는 무려 5억 5000만개. 창고 1개당 최대 저장 용량은 샘플 150만점이다. 3개 창고에 450만점(최대 씨앗 22억 5000만개)을 쌓을 수 있다.

하지만 북극 스발바르의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다. 지난 3월 스발바르대학센터(UNIS)는 "지금처럼 탄소 배출량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지구 온난화로 스발바르의 평균 기온이 2100년 안에 영상 10도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놨다. 스발바르의 빙하가 줄어들면서 녹지 않는 영구동토층도 덩달아 감소 중이다. 이 때문에 핵폭발도 견디게 한 SGSV가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7년 여름 SGSV 창고 3곳 중 1곳 입구로 동토층에서 녹은 물이 흘러드는 일이 벌어졌다. SGSV를 운영하는 노르젠이 발칵 뒤집혔다. 이후 방수처리 작업을 했다.

롱이어비엔 마을에서 자주 만난 야생 순록 가족. 수컷 한 마리는 더 멀리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조홍복 기자
롱이어비엔 마을에서 자주 만난 야생 순록 가족. 수컷 한 마리는 더 멀리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조홍복 기자


스발바르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 야생 순록 모습./ 조홍복 기자
스발바르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 야생 순록 모습./ 조홍복 기자


롱이어비엔 마을에선 야생 순록이 자주 출몰했다. 순록 가족 3마리가 하얀 눈밭에 듬성듬성 난 마른 풀을 찾는 등 먹이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7월에는 스발바르 야생 순록 200여마리가 죽은 채 발견됐다. 기후변화가 원인이었다. 지난해 12월 겨울에 때아닌 비가 스발바르에 많이 내렸고, 눈이 녹아 다시 얼어붙으면서 풀이 얼음 속에 파묻혔다. 풀을 먹지 못한 순록이 집단 폐사한 것이었다. 40년간 스발바르 순록을 관찰해온 지역 연구소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스발바르 북극곰도 기후변화에 몸살을 앓고 있다. 롱이어비엔 인구 2300여명보다 2배쯤 많은 북극곰 4000여마리가 스발바르에서 서식한다. 북극곰은 먹이 사냥에 얼음이 꼭 필요하다. 빙하가 녹으면 재빠른 물범 등을 잡을 수 없어 굶어 죽는다. 최대 100㎞를 헤엄치는데 중간에 쉬는 얼음이 없으면 익사한다. 2500년이면 북극곰 개체 수가 3분의 2로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롱이어비엔 공항에 전시돼 있는 북극곰 박제품./ 조홍복 기자
롱이어비엔 공항에 전시돼 있는 북극곰 박제품./ 조홍복 기자


스발바르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 북극곰./ 조홍복 기자
스발바르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 북극곰./ 조홍복 기자


북극곰 출몰 주의 경고판을 붙잡고 있는 기자. 스발바르 전 지역에 이 경고가 적용된다./ 조홍복 기자
북극곰 출몰 주의 경고판을 붙잡고 있는 기자. 스발바르 전 지역에 이 경고가 적용된다./ 조홍복 기자


나심 탈레브 뉴욕주립대 교수는 "‘블랙 스완’과 같은 최악의 기후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검은 백조(블랙 스완)가 18세기에 나타났다.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는 엄청난 기후변화가 쓰나미처럼 예고도 없이 나타난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기후변화가 이대로 지속한다면 북극곰과 순록이 스발바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전문가들은 "미래에 SGSV 보관 씨앗의 발아를 100%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더 안전한 지구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지금의 땅에서 식량 작물을 키우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아스달씨는 "역설적이게도 씨앗은 영원히 저 얼음 땅에 묻혀 있어야 한다"며 "반입된 종자가 바깥으로 나오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노르웨이(스발바르)=조홍복 기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7/2019110701989.html?utm_source=urlcopy&utm_medium=share&utm_campaign=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