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세상만사 ▣/이런일 저런말

발해 건국되기까지 30년 공백 가시밭길의 고구려 부흥운동 이어져

by 세월따라1 2010. 1. 17.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는 누가 세운 어느 나라일까?" 이건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는 문제다. 대조영(大祚榮·?~719)이 세운 발해(渤海)다. 그런데 여기서 '서기 698년'이라는 발해의 건립 연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게 668년이니 무려 30년이 지나서야 새 나라가 세워졌던 것이다. 당시 신라 임금인 효소왕은 고구려 멸망 당시 임금이었던 문무왕의 손자였다. 도대체 왜 이런 시차(時差)가 생겼을까?

평양성 함락 직후로 시곗바늘을 되돌려 보자. 멸망 뒤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거셌다. 669년 검모잠(劍牟岑)이 왕족 고안승(高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을 기점으로 고구려 부흥의 깃발을 들었다.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한 것은 다름 아닌 신라였다. 왜 그랬을까? 당나라의 침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고구려 유민 세력을 당군(唐軍)의 1차 저지선, 즉 방패막이로 삼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670년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군과 요동 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이걸 안시성(安市城)을 중심으로 일어나던 요동 지역의 부흥군과 연결하려는 시도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와 신라 모두를 적으로 돌린 당나라는 반격을 시작했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한다. 고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로 망명한 것이다. 추대받은 자가 추대한 자를 죽이고 달아났다니? 아마도 당군의 공격을 앞두고 지도부 내에 분열이 생겼고 친(親)신라 세력인 고안승이 자립을 꿈꿨던 검모잠 세력을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671년 안시성이 함락됨으로써 요동의 고구려 부흥 세력은 타격을 입었다. 신라군과 연합한 부흥군 잔여 세력은 672년 백수산(白水山·백빙산)전투, 673년 호로하(瓠瀘河) 전투에서도 패하고 남은 병력은 신라로 철수했다.

이들은 다시 신라와 연합해 675년 매소성(매초성)전투에서 당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구려 부흥운동만큼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나당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이용만 당한 채 희생됐을 수도 있다.

망명한 고안승은 어떻게 됐을까. 문무왕은 고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전북 익산인 금마저(金馬渚)에서 살게 했다. 백제가 새 수도로 건설하려 했지만 천도 직전 멸망해 뜻을 이루지 못했던 곳이 고구려인들의 안식처가 된 셈이다.

고안승의 나라 이름은 보덕국(報德國)이었다. '(신라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신라의 속국이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태대형'이나 '소형' 같은 옛 고구려의 관등을 쓰면서 나름대로 자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체제 강화로 보덕국에도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683년 신문왕이 고안승을 서라벌로 불러 신라 관직과 김(金)씨 성을 내리자 684년 보덕국 왕족 대문(大文) 등이 신라에 '모반'하다 처형됐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신라 장군 두 명이 전사할 정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보덕국은 해체됐다. 676년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철수시키고 나서도 요동의 고구려 부흥 세력은 소멸하지 않았다.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吐蕃)의 침공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당나라는 요동에 유화책을 썼다. 677년 '요동주도독 조선왕'이라는 관직을 새로 만든 것이다. 이 '조선왕'은 당나라로 강제 이주한 유민들과 함께 요동에 부임했다.

누구였을까?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寶藏王)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옹립됐던 허수아비 임금이자 폐주(廢主)라는 오명까지 썼던 그는 이때만큼은 호락호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장왕은 몰래 유민들을 규합하고 말갈과도 연락을 취하며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했다. 이것이 발각돼 681년 보장왕은 다시 당나라로 소환됐다. 하지만 이 지역은 이후에도 동요를 멈추지 않아 당나라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다시 안동도독으로 보내야 했다.

멸망 직후 들불처럼 일어났던 부흥운동이 불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좌절되고 상당수 유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한 세대 정도의 기간 동안 나라를 복원할 구심점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장왕과 대문의 예에서 보듯 옛 나라를 재건하려는 의지만큼은 계속되고 있었고 이는 끝내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원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5/2010011501315.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2&Dep3=h2_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