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정명론(正名論)에 입각해서 보면 ‘말(언어)’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다.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성과 논리적 합리성 위에서 심오한 역사의식까지 내포하는 고도의 문화행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에 우리는 일본과 7년에 걸쳐 큰 전란을 치렀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조·일전’이나 ‘임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르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1627년 인조 5년 정묘년에 후금(後金)의 침입, 1636년 병자년에 청나라의 침입도 모두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 했지 ‘조·후금 전’이나 ‘조·청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정당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戰)’이나 ‘전쟁(戰爭)’이라는 것은 피차 정통성 있는 나라끼리 무력으로 다투는 행위를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서로가 당당히 선전포고를 하고 전투행위를 하는 것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더구나 정통성도 없는 임의 집단이 정통성 있는 국가체제에 도전하는 행위는 ‘전쟁’이라는 이름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일러 ‘난’(亂)이라 하는 것이다.
반대로 정통성 있는 국가권력이 정통성 없는 임의 집단을 응징하고 징벌하는 행위를 우리는 ‘벌(伐)’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비를 ‘토벌(討伐)’한다, 오랑캐를 ‘정벌(征伐)’한다고 하지 공비나 오랑캐와 전쟁을 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영어에는 이런 사리의 분별이 별로 없는 탓인지 범죄와도 ‘전쟁’한다 하고, 심지어 마약하고도 ‘전쟁’한다고 하지만 우리말로는 이런 것은 ‘벌(伐)’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 ‘소탕(掃蕩)’한다고 하는 것이다. 남의 말에서도 좋은 것, 나은 것은 배우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우리보다 못한 것, 사리에도 맞지 않는 것까지 마구 모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에 죄를 짓는 것이다.
내년(2010년)이 6·25동란 60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에서도 각종 기념행사를 다양하게 또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 잘하는 일이다. “천하가 비록 태평해도 항상 전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天下雖平 不敢忘戰).” 중국 송(宋)대의 대문장가인 동파 소식(蘇軾)의 말이다. 6·25에 대한 전후세대의 올바른 인식과 참전국과의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위해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다고 하니 반갑고 고맙기까지 하다. 그런데 각급 검인정 교과서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부의 공식문서에서조차 말끝마다 6·25를 ‘전쟁’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이 어이 된 일인가?
사실을 말하면, 6·25 발발 당시 우리는 이를 ‘사변’이라 불렀다. 졸지에 불법 남침을 당했으니 일단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 후 1953년 휴전이 되자 그동안의 여러 정황들을 종합 고려한 끝에 ‘6·25 동란’으로 명명(命名)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해서 정부나 민간에서나 모두 그렇게 명기해 왔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한국전쟁’ ‘6·25 전쟁’으로 둔갑해 버렸다. 그러면 남침을 도발한 북에서는 6·25를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그들은 언필칭 ‘조국통일성전(聖戰)’이라 하고, 김일성에 의한 남조선 ‘해방전쟁’이라고 공식화하고 있다.
우리가 6·25를 ‘전쟁’으로 공식화한다면 이는 영어의 ‘war’를 맹목적으로 번역 추종하는 비주체적 망동이거나, 아니면 북측의 주장과 논리에 동조·영합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저들은 지금 6·25를 조국통일의 성스러운 전쟁이라 하고, 이를 남측이 외국군까지 끌어들여 방해했다고 우겨대고 있는데, 우리 쪽에서 이를 ‘전쟁’으로 인정한다면 오늘의 위정자들은 그 결과가 가져올 무서운 역사성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인가?
홍일식 ㈔한국인문사회연구원 이사장·전 고려대 총장
원문보기 http://news.joins.com/article/176/3900176.html?ctg=2001&cloc=home|list|lis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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