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로 이야기
100여년 전 대한제국 시절, 귀빈들이 드나들던 영빈관 언덕의 늙은 은행나무에선 낙엽이 비처럼 흩날렸다. 고목 옆엔 낡은 옛 계단이, 그 뒤쪽엔 발굴 뒤 거적을 덮어쓴 옛 건물터의 앙상한 지반이 보였다. 서울시청 광장과 플라자호텔을 지나 남산 쪽으로 뚫린 소공로변 주차장(112-9번지) 들머리에서 엿보는 대관정 터 유적의 지금 가을 풍경이다. 소공로는 차량만 붐비는 통과로에 가깝지만, 조선호텔 맞은편의 이 대관정 터 언덕은 외부 출입이 통제된 채 고립된 역사 유적의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옛적 조선 태종 따님 살던
‘소공주댁’에서 이름 따와
고종 근대도시계획 ‘시발점’
한양서 가장 전망 좋은 언덕에
대한제국 영빈관 ‘대관정’ 들어서
70년대까지 경제·문화 중심지로
1937년 지어진 한일빌딩 등
근대건물 역사 유산으로 남아
최근 ‘대관정터’ 호텔건립 논란에
“역사성 살린 도시재생을” 목소리
남산 쪽으로 바라본 일제강점기의 소공로(장곡천정) 거리 풍경.
최근 부영그룹이 대관정 터와 주변 근대건물들을 헐고 27층짜리 호텔 신축을 추진하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소공로는 새삼 논란의 장소로 떠올랐다. 건축사가인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의 말대로 소공로는 ‘우리 근대사의 첫 거리’인 까닭이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딸이 시집간 소공주댁(남별궁: 조선호텔 인근)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진 소공로는 19세기 말 고종이 구상한 첫 근대 도시계획의 시발점이었다. 남산 아래 한국은행에서 시청 앞까지 500여m 비스듬하게 뻗은 너비 20m의 길과 거리는 근대도시사의 현장박물관이기도 하다. 1897년 조선호텔 부근 환구단에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파리 가로를 본뜬 방사형의 소공로가 닦였고, 일제강점기와 1950~70년대 금융기관과 언론사, 양복점, 무역사무실, 식당, 카페 등이 길가 양옆에 들어섰다. 1980년대 이후 쇠락했지만, 소공로변은 지난 100년간 우리 근대 도시 경관이 격변해온 역사를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지난 8일 낮 소공로 일대의 도시유산들을 걸으며 살펴봤다. 답사의 첫 기점은 대관정 터 주차장 앞. 한화빌딩과 한국은행 신관 등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이곳은 안쪽의 언덕배기 유적보다 옆 건물 외벽에 걸린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항공사 광고판으로 시민들에게 더 익숙하다. 빗물로 홈줄이 곳곳에 파인 대관정 터 언덕을 찍으려 하자 경비원이 막는다. “사유지다. 접근하지 마라”고 부르댄다. 먹먹한 마음으로 물러나 언덕과 맞은편 조선호텔 안쪽의 환구단 지붕을 번갈아 쳐다본다.
100여년 전 이 언덕은 도심에서 전망이 가장 뛰어난 명당이었다. 덕수궁과 태평로가 한눈에 굽어보였다. 이런 입지 덕분에 외세 권력자들에게 안성맞춤의 처소가 됐다. 1898년 미국 선교사 헐버트가 살던 빅토리아 양식 벽돌집을 대한제국 정부가 사들여 이듬해 방한한 하인리히 독일 친왕 등의 외빈 숙소로 쓴 것이 대관정 역사의 시작이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조선을 점령한 일본군은 대관정을 군사령부와 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로 삼았다. 이듬해 을사늑약 체결 당시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도 머물면서 덕수궁의 대신들을 호출해 체결을 강압했고, 1907년 군대 해산을 장교들에게 통고했던 현장도 여기다. 하세가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소공로는 일제강점기 내내 하세가와초(장곡천정)로 불렸다. 대관정은 1920년대엔 경성부립도서관, 해방 이후 서울시립남대문도서관과 5·16 뒤 민주공화당 당사로 쓰이다 1970년대 헐리지만, 1914년 환구단을 훼손하며 지은 맞은편 조선호텔과 함께 유한층들의 거리로 소공로의 공간 정체성을 빚어낸 배경이 된다. 바로 북쪽 플라자호텔 터에도 1930년대 소설가 이상과 박태원 등 문인들이 드나들던 다방 ‘낙랑파라’와 단골 문화행사장이던 경성상공회의소 공회당이 있었고, 그 언저리는 화교촌이 번성했다.
소공로 남쪽으로 오른편 인도를 따라 걸으면 거리 터줏대감인 7개의 근대 빌딩을 만나게 된다. 먼저 셔터가 내려진 낡은 빌딩 2곳과 1937년 조선토지경영회사 사옥으로 지은 5층짜리 한일빌딩이 보인다. 아치창과 타일벽의 중후한 외관을 지닌 소공로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이다. 뒤이어 1969년 정면창에 장식띠를 두른 당대로서는 첨단의 모더니즘 양식으로 지은 옛 서울은행 본점 건물인 한우·삼보빌딩 등을 볼 수 있다. 이 건물군은 중년 시민들에게 양복점 거리와 오퍼상이 들어찼던 오피스타운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지금은 각 건물 1층에 양복점 서너 군데가 중소식당들과 함께 남아 있을 뿐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소공로변에 들어선 양복점들은 1960~70년대가 전성기였다. 취미양복점, 모모양복점, 해창양복점 등은 장안 부유층 단골가게로, 여기서 옷을 지어 입는 것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다. 건너편 조선호텔 골목은 언론사와 각종 레스토랑, 다방, 양품점 등이 들어선 뉴스의 거리, 고급 소비문화의 산실로 유명했다. 태평로 의사당 시절 정치인들은 소공로 식당, 술집 등에서 밀담을 나누고 양복점에서 정장을 갖춰입고 기자들을 만났다.
1975년 의사당이 여의도로 옮겨가고 1978년 남산3호 터널이 뚫리자 소공로는 강남·강북행 차들이 지나쳐가는 길이 돼버렸다. 양복점들도 기성복에 밀려 점차 문을 닫고, 1980년대 재개발 실패와 1997년 금융위기 등을 거치며 빌딩들은 텅 빈 채 방치되거나 마네킹 널린 창고로 전락했다. 남은 양복점 업주들은 호텔 개발을 안타까워했다. 해창양복점의 한창남(81) 대표는 “양복점 거리는 서울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유산”이라며 “헐지 말고 리모델링해 역사가 깃든 문화상가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빌딩군을 지나 답사의 끝인 한국은행 구관 앞에 이르렀다. 인도가 넓어지고 가로수공원처럼 풍경이 바뀌었다. 건립 100년을 넘긴 구관의 바로크식 첨탑 아래서 시인 김광균이 식민지 시대 이 길을 거닐며 썼던 시를 읽어본다.
“이 길을 자꾸 가면 옛날로나 돌아갈 듯이 등불이 정다웁다/ 그 등불 우에 눈이 내린다/ 보면 볼수록 하이얀 눈이/ 빈 포켓에 손을 찌른 채 나는 잠자코 눈을 맞는다/ 내리는 눈발이 속살거린다/ 옛날로 가자/ 옛날로 가자”(‘장곡천정에 오는 눈’의 일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12353.html?_fr=m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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