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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사 ▣/이런일 저런말

"나는 사우나보다 도서관을 사랑하는 남자"

by 세월따라1 2016. 8. 10.

[산문집 '안녕, 나의 모든 하루'' 펴낸 김창완]
"책과 함께면 늙는 것 안두려워"



수박에 이어 치즈를 칼로 자르던 김창완(62)에게 물었다.

"아까 수박 썰던 칼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는 안 합니다."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의 자택 부엌. 손님을 위해 '주부'를 자처한 그에게 농담을 던지자, 웃지도 않고 정색한다. 그런 건가. 무대에 설 때, 드라마나 영화를 찍을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그때마다 칼을 새로 잡는 것일까.

'안녕, 나의 모든 하루'(박하 刊)를 펴낸 '작가' 김창완을 만났다. 허를 찌르는 다재다능이야 이름난 지 오래다. 글 쓰는 김창완은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 판타지 소설 '사일런트 머신 길자' 등을 펴냈고, 문예지에 동시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안녕,…'은 정체성이 모호했다. 출판사가 책 띠지에 홍보 문구로 적은 "방송에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진 김창완의 인생 철학에세이"라는 문장으로 짐작할 수는 있지만, 정작 책 내용에는 어떻게 쓰고 모은 글인지에 대한 설명이 한 줄도 없다.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어요. 책을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흘러간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게 내 철학과는 맞지 않았거든. 떠나간 것은 떠나간 대로. 서문에 정확한 사연을 적지 않은 것도 그래서고, 16년 동안이나 책으로 내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고."


김창완이 말한 16년은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기간이다. 매일 아침 9시에 시작하는 SBS 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팬들은 '아침창'으로 부르는 이 프로그램의 DJ 인사말을 이 책에 모았다고 했다. 프로그램 방송 작가들이 대신 쓰는 경우가 많은 이쪽 관행과 달리, 16년 동안 모든 글을 직접 썼다는 게 그의 자부(自負). 스마트폰으로 글을 쓴 최근 1~2년을 제외하면 모두 육필이다. 시인인 정해종 박하 출판사 대표가 "한 장씩 쓴 육필 원고가 라면 상자 하나를 꽉 채웠다"고 귀띔한다.

"남에게 맡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다른 사람 아침이 아니라 내 아침을 전달하겠다는 게 이 인사말의 목적이었으니까. 정말 할 말 없을 때는 차라리 '오늘은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몇 년에 한 번 있는 일이었지만."

흔한 잠언(箴言)이나 경구(警句)와 달리, 이 책에는 김창완만이 쓸 수 있는 일상과 성찰이 있다. 환풍기 소리에 집 부엌 창문으로 찾아오는 고양이, 코 받침이 납작하게 눌려 있던 침대 위의 안경, 노량대교를 자전거로 통과한 뒤 바라보는 당인리발전소의 굴뚝, 6시 53분의 신도림역 아침 풍경, 어린이날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세월호의 충격과 슬픔….

"오랜만에 제 글을 다시 읽는데 짧은 순간이나마 스스로에게 솔직하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낼까 주저했던 마음에 위로가 되더군요."

인터뷰가 끝난 뒤 동네 치킨집에서 소박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아침창'의 바로 다음 프로그램인 '이숙영의 러브 FM'의 작가 송정연씨가 합류했다. "9시 직전 방송사 로비 벤치에 엎드려 아침 인사말을 적고 있는 선생님 모습을 목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게 벼락치기 하듯 쓰는데, 정말 잘 쓴다는 거죠. 우리 작가들의 '공공의 적'이에요."

겸연쩍게 그가 웃는다. '작가 김창완'이라는 호칭을 여전히 어색해하는 그에게 글쓰기는 어떤 쾌감을 주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즐거움을 주고 싶은 것일까. "말은 예민한 향기처럼 금방 사라지죠. 그 향기를 잡아서 글로 전달하고 싶은데, 금방 사라지는 향기를 붙잡는다는 건 정말 어려워요."

그는 매주 화요일 밤 방송하는 KBS 1TV '김창완과 책읽기' 진행자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에게 부담 주는 '군림하는 책읽기'를 벗어나자는 게 이 '책 DJ'의 목표. 그가 사는 서래마을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코앞이다. "나는 사우나보다 도서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책 DJ가 큰소리다. 그의 또 하나의 자부는 국립중앙도서관 회원증. 알코올과 함께 그가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은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직접 찾지는 못하지만, 나는 늙는 게 무섭지 않아요. 도서관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책과 함께라면 노화(老化)도 두렵지 않다. 비록 허풍일지 모르지만, '영원한 독자' 김창완의 이번 칼도 썩 잘 어울렸다.


[출처]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10/20160810000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