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이슈마다 헌재에 떠넘기기… 이전투구 정치판 해결사로까지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0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지난 10월 29일 헌법재판소는 3건의 결정을 내놓았다. 이날 헌재는 이른바 ‘미디어법’의 국회 통과 과정의 정당성과 통과된 법이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졌고, 우리사회 사교육 진원지로 지목받는 학원의 심야교습을 제한하는 게 온당한지도 심판했다. 그리고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된 비례대표 의원을 뒷순번이 승계하는 것을 막는 게 합당한지에 대해서도 답했다.
이날 헌재가 결정한 사안들은 하나같이 우리사회에 던지는 파장이 적지 않은 민감한 이슈들이었다. 이날 서울 종로구 재동의 헌재 건물 앞에는 정당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몰려들어 헌재의 결정이 나올 때마다 일희일비를 반복했다. 미디어법을 헌재에 들고 갔던 민주당 등 야당 관계자들은 헌재의 발표를 듣다가 ‘절차상 하자’를 언급할 때는 환호를 올렸지만 곧 ‘법안이 유효하다’는 결정에는 배신감을 토로했다. 학원들은 심야학습 제한 결정에 “생존권 침해”라며 반발한 반면, 헌재의 결정으로 의원 3석의 승계가 가능해진 친박연대는 환호했다.
우리사회는 요즘 헌재에 길을 묻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존재도 낯설었던 헌재 재판관 9인이 우리사회의 ‘심판관’ 내지 ‘해결사’로 자리잡았다. 정치권의 대형 이슈부터 서민들의 억울함까지 모두 헌재로 들고 가는 일이 익숙한 풍경이 돼버린 것이다.
DJ·노 정권 이후 급증, 2007년 1771건
이같은 ‘헌재 만능주의’는 우리사회에 헌법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에 대한 각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실제 헌재에 접수된 사건은 인권을 중시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급증한 양상이다. 헌재에 접수된 사건은 1999년 기존 연간 600건대에서 900건대로 뛰어올랐고, 2001년 1000건을 돌파했다. 그후로도 계속 증가세를 보이며 2007년 1771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헌재 사건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 등을 호소하는 헌법소원. 헌재의 한 관계자는 “요즘에는 일반인들도 기본권을 침해 받았다며 헌재에 사건을 들고 온다”며 “헌재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사회의 법에 대한 인식이 한 차원 높아진 측면이 분명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2008년 6월 헌재가 판결한 ‘ TV 방송광고 사전심의는 위헌’이라는 결정은 일반인의 헌법소원이 계기가 됐다. 강릉시에서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는 김모씨가 “ YTN에 가게 광고를 청약했으나 사전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며 2005년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헌재는 “사전검열은 실질적으로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사상이나 의견이 발표되기 전에 그 내용을 심사·선별해 발표를 사전에 억제하는 제도”라며 “이는 헌법뿐 아니라 법률로서도 불가능하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일반인의 헌법소원으로 행정기관이 사전심의를 하던 우리사회의 마지막 분야가 사라지게 됐다.
하지만 헌재 만능주의에는 이런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우리사회를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대형 정치적 이슈들이 잇따라 헌재의 심판대로 올려지는 현상에 대해 우려한다. 헌재 만능주의의 이면에 있는 ‘헌재 의존증’이야말로 사회 각 부문에서 자기 조정, 타협 능력을 상실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려와 비난이 집중되는 것은 정치권이다. 강경근 숭실대 교수(헌법학)는 “헌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헌재가 갈등에 휩싸이며 헌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정파적이 돼버렸다”며 “정치권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며 사회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다 해결이 안되면 일종의 도피처처럼 헌재로 사안을 끌고 가는 행태가 문제”라고 말했다.
입법권 가진 국회, 걸핏하면 헌재행
최근 헌재 결정에서 가장 논란을 부른 미디어법이 대표적이다. 미디어법은 여야가 극한 대치와 난투극까지 벌이며 장기간 끌고 온 사안이다.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까지 구성하며 여론수렴을 시도했지만 끝내 여야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지난 7월 22일 국회 본회의 표결 과정에서 국회법상 일사부재의 원칙(한번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중에 다시 안건으로 올리지 못한다는 원칙)과 대리투표 문제가 불거지며 야당이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결국 정치권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채 공을 헌재로 떠넘겨 버렸다고 볼 수 있다. 한 소장학자는 “국민을 지치고 창피하게 만든 미디어법을 결국 헌재까지 끌고 간 것은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뽑아준 국민을 기만하고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며 “헌재 결정을 비판하기 전에 정치적 사안을 헌재로 손쉽게 넘겨 버리는 행태에 대해 정치인들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론적으로 국민이 선출한 대의기구이자 입법권을 가진 국회가 임명기구인 헌재에 문제 해결을 의뢰한 것 자체가 난센스라는 지적도 있다. 헌재가 이번에 ‘절차 하자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유효’라는 취지의 결정을 내리며 “권한 침해로 야기된 위헌·위법 상태의 시정은 피청구인(김형오 국회의장)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결 선포 행위의 효력에 대한 사후 조처는 오직 국회의 자율적 의사결정에 의해 해결할 영역에 속한다” 등의 입장을 강조한 것도 입법부의 권한과 위상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회 이전투구가 헌재로 넘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해 12월 민주당이 여당의 한·미 FTA비준동의안 단독 상정과 관련해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한 것도 제목만 다를 뿐 미디어법이 헌재의 심판대에 올려진 과정과 흡사하다. 한나라당 소속인 박진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 전기톱과 해머가 난무하는 와중에 한나라당 위원만 참석시켜 한·미 FTA비준동의안을 상정해 통과시키자 야당 의원들이 “의안 심의 표결권을 침해한 행위”라며 반발한 끝에 헌재에 심판을 청구했기 때문이다.
떠넘겨 놓고 불리한 결정 내려지면 욕
정치권이 제 할 일을 못하거나 괜한 문제를 일으키다 헌재로 문제를 떠넘긴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헌재의 존재감을 국민에게 각인시킨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수도 이전’이 대표적이다. 2003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야당인 한나라당은 충청표를 욕심내며 충청도로 수도를 옮기는 신행정수도법을 통과시켰다가 결국 헌재에서 제동이 걸렸고, 2004년에는 야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1000만표를 얻어 당선된 대통령에 대해 불쑥 탄핵을 의결하고 최종 해결을 헌재로 떠넘겼다.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난 종합부동산세의 경우도 노무현 정부가 위헌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수를 두다가 비싼 비용만 치른 채 결국 헌재의 손으로 잘못이 바로잡혔다.
최종 해결을 헌재에 떠넘기면서도 정치권이 헌재의 결정을 깨끗하게 수용한 적은 별로 없다.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지면 항상 “정치적 판결”이라는 식의 비판을 퍼붓곤 했다. 과거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자 “헌재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며 치켜세우다가 ‘수도 이전’에 제동을 걸자 “사법쿠데타” “선출되지 않은 권력” 등의 막말을 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였다.
정치적 이슈에 휩싸인 헌재의 결정이 또 다른 갈등을 낳으며 헌재의 권위도 흔들리고 있다. 예컨대 ‘절차에 하자는 있지만 법안은 유효하다’는 이번 미디어법 관련 헌재 결정을 둘러싸고 ‘술 먹고 운전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강간을 했지만 성폭행범은 아니다’ ‘주가조작은 했지만 시세차익은 유효하다’는 식의 비아냥 섞인 패러디가 인터넷에 판을 치고 있다. 헌재의 법리를 제대로 이해한 후 비판하는 게 아니라 헌재 자체를 조롱거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헌재 해산’까지 주장하고 있다.
정치논란 휩싸이면서 위상도 흔들
헌재의 권위가 흔들리는 데는 헌재가 정치적 대형 이슈들을 ‘정치적으로’ 판단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 탓도 있다. 이번 미디어법 결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과거 헌재가 ‘정권 눈치보기’나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인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헌재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6월 “표현의 자유가 침해됐다”며 개인 자격으로 낸 헌법소원에 대해 대선이 끝난 작년 1월에야 기각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법소원은 대통령의 대선 개입과 직결된 사안이어서 대선운동 시작 전에 결정이 내려져야 실익이 있었지만 헌재는 정권이 바뀐 후에야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정권의 ‘작품’인 종합부동산세 관련 헌법소원도 2006년 12월에 접수됐지만 결정은 정권 교체 후인 2008년 11월에야 나왔다. 물론 헌재는 “시기적으로 약간 늦더라도 올바른 재판을 하는 게 중요하다”며 정권 눈치보기라는 비판을 반박하고 있지만 ‘사건 접수한 날로부터 180일 이내에 결정한다’는 내부 규정을 어겨가며 시간 끌기를 한 배경에 대해 의구심이 남는다.
어쨌든 우리 사회가 헌재에 복잡한 정치적 사안을 떠넘기며 ‘해결사’가 되기를 기대하는 한 역설적으로 헌재의 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인하대 이재교 교수(법학)는 “재판은 무엇이 최선의 정의인지 찾아내 승패를 가르는 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을 통합하고 최선 아니면 차선을 추구하는 정치와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 최대 사명인 헌재에 정치권이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해결해 주는 해결사 역할을 언제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헌재에 계류된 주요 사건
·사형제 폐지
·혼인빙자간음 위헌 사건
·군내 불온서적 반입 사건
·체외에서 생성된 배아의 인격체 여부 판단
·민간의 대체의학 허용 여부
·용산화재참사 관련 검찰 수사기록 공개 요구
헌법재판소 제대로 알기
역사 1987년 헌법 개정으로 탄생
헌재는 1987년 10월 개정된 현행 헌법과 함께 탄생했지만 헌법재판의 역사는 제헌헌법 때부터 있어 왔다. 제헌헌법에서는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대법관ㆍ국회의원 각 5인으로 구성되는 헌법위원회와 별도의 탄핵재판소를 두었다. 하지만 10년간 단 6건의 위헌법률 심판사건을 처리하는 등 역할이 미미했다. 이에 따라 1960년 개정된 헌법은 헌법위원회를 없애고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헌법재판소를 두도록 했다. 하지만 이 헌법재판소는 5ㆍ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구성되지도 못했다. 1962년 개정된 3공화국 헌법은 별도의 헌법재판기관을 두지 않고 대법원으로 하여금 위헌법률심판과 정당해산심판, 선거소송심판 등을 처리하도록 했다.
또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대법원판사 3인과 국회의원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별도의 탄핵심판위원회를 두었다. 이후 1972년 개정된 유신헌법은 제헌헌법 당시처럼 헌법위원회를 두었지만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해야 심판이 이루어지도록 해 헌법위원회를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대법원 판사들이 심판 제청을 하면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곤 했다. 이에 따라 유신헌법 시대 위헌법률심판은 단 1건도 없었다. 1980년 개정된 5공화국 헌법 역시 별도의 헌법위원회를 두었지만 대법원 판사 3분의 2 이상이 인정할 때만 심판을 제청할 수 있도록 했다.
현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헌법재판소는 1987년 개정된 헌법에 설치근거가 마련됐고 1988년 9월 1일 헌법재판소법이 발효돼 같은 달 15일 9명의 재판관이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구성 재판관 9인, 임기 6년 연임 가능
헌법재판소는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9인의 재판관은 대통령이 임명하는데, 3권 분립 정신에 따라 3인은 국회에서 선출하고, 3인은 대법원장이 지명한다. 9명의 재판관 중 한 명이 소장으로 임명된다. 재판관들의 임기는 6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헌재소장은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에 이은 4부 요인으로 예우를 받지만 재판에서는 재판관 9명 중 1명으로서 다른 재판관과 동일한 권한을 행사한다. 재판부에는 9인의 재판관 전원으로 구성되는 1개의 전원재판부와 재판관 3인으로 구성되는 3개의 지정재판부가 있다. 지정재판부는 헌법소원심판의 사전 심의를 담당한다.
역할 위헌법률·탄핵·정당해산 심판 등
헌법재판소는 하위법이 헌법에 위반되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위헌법률심판 외에도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을 받아 고위 공직자에 대한 탄핵심판을 맡는다. 이밖에도 정당해산심판과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을 담당한다. 권한쟁의심판은 국가기관 상호간이나 지방자치단체 상호간 또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또는 권한이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관한 다툼을 해결하기 위한 재판이며, 헌법소원심판은 헌법에서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받았는지 여부를 따진다.
결정의 종류 합헌·위헌 외에 헌법불합치·한정위헌 등
헌재는 접수된 사건을 심판해 합헌, 한정합헌, 한정위헌, 헌법불합치, 위헌, 인용, 기각, 각하 등의 결정을 내린다. 이 중 헌법불합치는 해당 법률이 사실상 위헌이기는 하지만 즉각적인 무효화에 따르는 법의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을 개정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그 법을 존속시키는 결정이다.
위헌 결정에는 재판관 6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인용은 청구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기각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각하란 당사자의 신청에 대하여 소송 요건에 하자가 있을 때 본안심리를 하기 전에 재판 자체를 거절하는 결정이다.
정장열 차장대우 jrchung@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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